잊혀진 전쟁 Forgotten War이라 스스로 부르는 미군의 입장에서 본 한국전쟁은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그들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힌 제한전이었다. 일본에 진주한 미군은 1945년 이후 5년간 승전국 군인으로서 달콤한 휴가를 보내면서 군인이 아니라 치안을 담당하는 경찰의 모습으로 바뀌고 있었으며 실전을 경험했던 병사에서 기본군사훈련을 마치면 일본이라는 휴가지에서 즐기고자 마음먹은 나약한 신병의 군대로 변하기까지 5년의 세월은 그리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이에 비해 중공군은 1927년부터 1936년까지 1차 국공내전 , 1937년 중일전쟁 그리고 1945년 이후 2차 국공내전을 통해 4년간의 치열한 실전을 치르고 새로이 건국된 신생 중화인민공화국의 군대로서 1840년 아편전쟁 이후 서양에게 당한 백 년의 치욕을 되갚기로 작정한 수십 년간 실전으로 단련된 중공군의 사기와 결기는 단순히 항미하고 원조하는 부대 그 이상의 전투력으로 무장한 군대로서 한반도에 들어왔다.
정치와 외교가 전쟁의 시작과 마무리를 지배한다면 정치와 경제는 전쟁에서 힘과 힘이 부딪히고 어느 한 지점에서 교착되는 지구전과 소모전이 진행되는 순간 활발한 전시순환경제는 자동으로 작동되고 이때 정치는 총력전과 제한전의 갈림길에서 갈등하게 된다.
아편전쟁 이후 백 년간의 치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중공군은 미군의 화력에 맞서 좀비처럼 돌진하는 이해하기 어려운 전술 앞에 미군은 경악했고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이에 더해 한국전에 파병한 군대의 보급을 위해 중국대륙의 정치는 총력전을 펼치며 미군의 화력에 대항하였다.
미군이 참전했다는 사실 만으로 침략한 적을 간단하게 제압할 수 있다고 믿은 미군은 전쟁 초반의 오판을 디디고 전세를 역전시켰지만 죽기 살기로 달려드는 중공군의 매복전술과 공세에 전의를 상실하고 전선의 원점 38선 부근에서 치열한 화력을 행사하며 간신히 중공군 병력의 남하를 저지하고 맷집과 사기를 키운 후 반격의 서막을 열려고 했으나 워싱턴의 정치는 제한전으로 한국전쟁을 마무리하고자 경제로서 확전을 통제했다.
1951년 기동전에서 고지전으로 전황이 바뀌고 가을이 되자 임진강부터 고성까지 인민군이 1730개, 중공군이 7789개의 갱도를 완성하였다. 미군의 막강한 화력에 살아남기 위한 적이 판 갱도의 총거리는 지구 한 바퀴 반을 돌 정도였다.
적장 펑더화이가 기적의 지하장성으로 부른 갱도로 인해 그해 여름만 해도 미군 포탄 40발에 한 명의 중공군이 사망했다면 갱도식 방어진지가 어느 정도 구축된 1952년 1월부터 8월 사이에는 미군포탄 680발 당 1명의 중공군이 사망하면서 미군화력의 효용을 극적으로 감소시켰다.
중공군의 총력전과 미군의 제한전이라는 정치적 판단으로 도로 허리가 잘린 한반도는 최전선이 고착되면서 서로의 필요에 의해 휴전회담이 진행되었고, 1908년 1월생은 산 사람은 살아야 하고 전시에도 교육은 지속되어야 한다는 근본적 물음에 답하기 위하여 고향에 어린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전시학교로 출근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