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에 돌아와 학교를 세우고 후학을 가르치고 자강 시켜 미래를 도모하느라 밤잠도 아끼며, 꿈꾸지 않았는지 기억나지 않았는지도 모를 정도로 전란과 폐허로 파괴된 대한민국에서 몸부림치고 있었던 1908년 1월생에게 1953년은 원산 앞바다가 내다 보이는 명사십리 백사장처럼 반짝거리는 희망으로 들떴다가도 눈을 뜨고 현실을 보면 젊은 날 첫 부임지 함흥사범학교가 있던 함흥평야가 동해로 내달려 도달했던 흥남항에서 흥남철수작전을 마치고 함포사격과 공중폭격으로 잿더미가 된 채 남아있는 을씨년스러운 흥남항의 폐허가 머리에 떠오를 때면 하루에도 몇 번씩 조증燥症과 울증鬱症의 업다운이 반복되는 극심한 감정기복을 느끼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정전협정 Armistice Agreement이 정식으로 조인되면서 전선에서는 1953년 7월 27일 22:00을 기하여 양측이 일제히 사격을 중지하였다. 정전협정조인의 역사적인 순간이 지나가고 다음날 아침이 되면서부터 국군 부대들은 정전협정 조항을 이행하려는 다른 유엔군 부대들과 함께 현 위치로부터 물러서기 시작하였다. 정전협정에 따라 설정된 군사분계선의 위치는 한강하구-임진강구-판문점-고양대-유정리-하갑령-밤성골-문등리-신탄리-수령-동해안 감호를 잇는 선이었다. 따라서 비무장지대 DMZ는 군사분계선을 중심으로 2Km 북쪽의 북방한계선과 2Km 남쪽의 남방한계선으로 설정되었으며, 쌍방은 군사정전위원회의 감독하에 군사분계선을 따라 규정된 표지물을 설치하여 경계의 관리 책임구역을 명확히 식별할 수 있게 하였다. 서해안에서 유엔군은 유엔군사령관의 군사적 관할 하에 남게 된 도서, 백령도. 대청도. 소청도. 연평도와 우도 등 서해 5도를 제외한 경기도와 황해도의 도계북서에 있는 여러 도서로부터, 그리고 동해안에서는 비무장지대 남방한계선 이북에 있는 여러 도서로부터 철수를 완료하였다.
대가 없는 평화가 없듯이 피와 땀이 서려 있지 않는 전쟁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굴종을 평화로 위장하기 쉽고 동족의 피와 땀으로 한 줌의 권력을 잡아 대대로 호의호식하려는 매국세력은 시대를 불문하고 우리 주위를 서성인다.
비무장지대 DMZ는 말 그대로 치열한 피아간의 희생을 치르고 한 뼘의 땅이라도 되찾기 위해 피와 땀이 서려있는 고지와 능선 평원과 계곡 그리고 동해, 서해 바다까지 갈라놓은 전쟁의 결과물이었다.
한국전쟁이 종전終戰이 아닌 정전停戰으로 마무리되고 육상의 군사분계선인 MDL(MilitaryDemarcation Line)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각각 2km씩 양국의 군대를 후퇴시킨 비무장지대 DMZ는 임진강 하구인 경기도 파주시 정동리에서 동해안인 강원도 고성군 명호리까지 총 248km, 1,292개 표지판으로 이어져 있다. 국제법상의 제도인 DMZ는 비무장화, 일정한 완충 공간 존재, 군사력의 분리 또는 격리 배치, 감시기구 설치 등 4가지 요소로 구성되지만, 현재 한반도 DMZ와 그 일대는 세계에서 가장 중무장되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곳이라는데 이견이 없다.
이렇게 4km 폭으로 248km 길이로 한반도 허리를 자르고 달린 비무장지대 DMZ는 역설적 명칭답게 긴장으로 70년을 지나고 있다.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이 수백 년의 쟁패 끝에 한국전쟁의 정전으로 가까스로 그어진 휴전선과 비무장지대 DMZ는 만만하고 호락호락한 분단선이 아니다. 비록 우리 민족에게는 통한의 분단선이었지만 격변하는 세계패권질서하에서는 그저 그런 무심한 힘의 균형점이 모인 선이요 구역이고 4km 두께의 벨트가 248km 뻗쳐 있는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의 경계이자 체제경쟁의 최일선이었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되었지만, 정전협정 정치회담의 두 가지 의제였던 한국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통일방안과 외국군 철수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1953년 10월 26일, 판문점에서 정치회담을 위한 예비회담이 열렸으나, 당시 대립하고 있던 송환거부포로 처리 문제가 빌미가 되어 1953년 12월 12일 아무런 성과 없이 끝이 나게 된다. 이에 한국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정치회담 개최가 유일한 대안이었다.
3년간의 전쟁으로도 풀지 못한 한반도 통일문제는 이제 해를 넘겨 스위스 제네바에서 정치회담을 통해 풀 수 있으리라는 한가닥 실낱같은 희망 만을 남겨둔 채 DMZ 1953년은 저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