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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 해 록] 백년전쟁 55,스미스 Smith1955

by 윤해


한국전쟁의 포성이 그치고 2년이 흐른 1955년 7월 5일 살아남은 스미스 특임부대 부대원들은 먼저 간 전우를 추모하며 540개의 돌탑을 쌓아 유엔군 초전初戰기념비 건립을 위해 오산 죽미령으로 모였다.

1950년 7월 5일 파죽지세로 남하하는 북한군 5천여 명을 저지하기 위하여 오산 죽미령에서 미군으로서는 한국전쟁 초전初戰, 첫 전투를 치러낸 미 24 보병사단 제21보병연대 1대대 찰스 스미스 대대장 예하 540명은 10배가 넘는 적군을 맞아 궤멸적 손실을 감수하고 적의 진격속도를 피로써 늦추어 대한민국을 기사회생시킨 전투가 오산전투 또는 죽미령 전투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전세를 가른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함께 세계 양대 동계 전투로 기록된 1950년 장전호 전투에서 미 해병 1사단을 이끌고 지휘했던 스미스 소장은 전형적인 야전군 지휘관으로 맥아더가 신임했던 행정장군 아몬드 중장의 신속북진 명령에도 불구하고 개마고원 낭림산맥의 험준한 지형 속으로 들어가면서 곳곳에 병참선과 거점 진지 활주로까지 확보하면서 작정하고 미최정예 해병 1사단을 궤멸시키기 위해 매복했던 중공군의 덫에 비록 걸려들어 이루 말할 수 없는 곤경과 위기에 처했지만 스미스 소장이 마련해 둔 병참선과 거점 진지를 활용하여 맥아더가 공군 수송기를 통해 탈출하라는 명령에도 불구하고 수송기로 탈출할 경우 최후에 남아 수송기를 엄호하는 대대급 부대의 희생을 생각하고 모두 걸어서 모든 장비를 챙겨서 후퇴가 아니라 스미스소장이 남긴 명언, 다른 방향으로의 진격을 성공시켰다.

비록 그 과정에서 미 해병 1사단은 미전사상 손꼽히는 피해를 입었지만 싸우면서 질서 있는 다른 방향으로의 진격을 통해 중공군에게 재편이 불가능할 정도의 타격을 주면서 함흥평야를 거쳐 흥남항까지 기적적으로 도달함으로써 두만강 혜산진까지 진격하여 고립될 뻔한 미군과 국군이 흥남항까지 집결할 시간을 벌어주었고 10만 명의 피난민과 10만 명의 군인 도합 20만 명의 인명을 사지에서 구출하였다.

이 흥남철수작전은 세계전사에 유례가 드문 성공적 철수작전이었으며 이것을 가능하게 한 미 해병 1사단이 걸어서 돌파한 장진호 전투를 지휘한 스미스 소장의 감투정신 때문에 후일 중공군의 남하선을 오산 삼척 라인에서 멈추어 세울 수 있었고 한국전쟁의 전황을 다시 38선 이북으로 밀어 올리는 데 있어 주요한 기여를 하였다.

대장장이 수공업자라는 의미의 스미스는 제분업자라는 의미의 밀러와 같이 서양에서는 흔하디 흔한 성씨이다. 우리나라로 봐서는 김, 이, 박과 비슷하려나. 어쨌든 우리나라를 공산세력으로부터 지켜내고 지금의 우리가 있게 한 한국전쟁 전사에서 우리는 대장장이 수공업자 가문의 두 사람 스미스 중령과 스미스 소장에게 큰 빚을 진 것도 한국전쟁의 간과하기 쉬운 비사가 아닐까 나름대로 생각해 본다.

전쟁이 끝난 지 2년째 1908년 1월생의 눈에 비친 1955년은 조금은 전쟁의 상흔이 해를 달리하면서 안정을 되찾고 있었고 그해 2월 18일 일제강점기 민족자강의 대표주자 인촌 김성수부통령이 세상을 버렸다. 민족의 화합과 계몽 교육을 위해 한평생을 헌신한 인촌의 삶은 식민지 시절 선각자로서 식민지 조선에 남아 자강 하고자 했던 모든 사람들에게 먼저 길을 만든 사람으로 귀감이 되었다. 인촌의 국민장이 끝나고 다음 달 우남의 팔순행사가 거창하게 열렸다.

권력은 무상하건만 어느새 독립전쟁에서 풍찬노숙했고 한국전쟁에서 특유의 외교력으로 누란의 위기를 돌파했던 팔순의 우남은 미국의 이름 모를 가정에서 태어난 수많은 스미스들의 피와 땀으로 지켜낸 이 나라를 번영으로 이끌어야 할 막대한 책무와 소명이 있어야 함에도 팔순 노구 주위로 몰려드는 이기붕 박마리아 부부와 같은 불나방처럼 달려드는 존재를 의식하기도 떨쳐내기도 힘에 겨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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