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4년 4월 26일부터 6월 15일까지 개최된 제네바 회담에서 정전협정에 이어 한반도 분단을 해결하려는 민족의 염원도, 통일을 향한 실낱같은 희망도 사라졌다. 그저 우리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 속에서 통일을 부르는 신세가 되었다.
수백만이 희생되고도 국토가 폐허가 되고서도 무력통일은 성사되지 못했다. 이처럼 세상의 원리는 세를 얻어야 하고 세는 비빌 언덕이 있어야 한다. 1954년의 세계질서는 한반도의 통일보다는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의 전선이 어디까지이며 어디에서 멈추어 교착할 것인지가 중요했지 한반도의 허리가 잘리는 것이 우리 민족에게 얼마나 비극적인 것인지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렇게 남과 북은 다른 나라가 되어 다른 체제 다른 이념 다른 국민과 인민으로서 살아가야 하는 한반도 백년전쟁의 질곡을 넘고 있었다. 북은 공산진영 남은 자유진영으로 편입됨으로써 한국전쟁은 포탄과 총알이 빗발치는 열전을 지나 물밑의 공작과 스파이가 암약하는 냉전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토사구팽, 토끼 사냥이 끝나면 토끼를 몰아붙이던 사냥개는 더 이상 쓸모가 없으니 삶아 먹는 세태가 냉전의 초입이다. 누가 사냥개인지 누가 사냥개를 부리는 주인인지를 가리는 치열한 권력 다툼은 전쟁이 끝나고 난 후 남북한 모두에서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사사오입개헌四捨五入改憲은 1954년 제3대 국회에서 정족수 미달의 헌법개정안을 통과시킨 사건이다. 1952년의 발췌개헌에 이은 두 번째 개헌이었다. 헌법개정의 주요 목적은 이승만 대통령의 영구 집권이었다. 당시 헌법에 따르면 대통령은 1차에 한하여 중임할 수 있었는데, 이 제한을 초대 대통령, 즉 이승만 1인에 한해서만 적용하지 않는 것이 사사오입四捨五入개헌의 핵심이었다. 헌법 개정에는 국회 재적의원 203명의 3분의 2인 135.333... 명 이상의 찬성표가 필요하였고, 이 개헌안에 대해 찬성 135표가 나와 부결이 선포되었다. 그러나 이틀 후 여당인 자유당과 정부에서는 사사오입四捨五入의 논리를 주장하며 개헌안이 가결되었음을 선포하였다.
대한민국 억만년의 터라고 1948년 7월 17일 제정한 제헌헌법이 비록 미증유의 한국전쟁을 감안하더라도 1952년 7월 7일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여 4년 만에 개정되었고 또다시 전쟁이 끝난 후 1954년 11월 29일 사사오입四捨五入이라는 희대의 해석으로 우남의 종신대통령의 길을 열어준 사사오입개헌은 어쩌면 망국의 독립전쟁, 건국의 해방정국, 누란의 6.25 전쟁을 겪으면서 오로지 애국애족 하였고 그 어려운 과정 과정마다 실력과 지력이 겸비된 외교력으로 강대국지도자들을 상대로 기어이 대한민국 국익을 가져왔던 팔순의 우남에게는 인생말로난으로 달려가는 계륵鷄肋과도 같았다.
빼앗긴 들에도 봄이 오고, 초토화된 국토에도 꽃은 피듯이 전쟁으로 점령과 탈환을 반복했던 서울을 뒤로하고 남으로 내려간 1908년 1월생과 같은 피난민들은 전쟁의 포성은 그쳤지만 여전히 인공치하의 트라우마 때문인지 귀경치 않고 지방의 피난지에서 각자의 능력과 재능으로 새로운 시작을 한 결과 그들이 머문 자리에 새로운 기운이 움터고 있었고 종이에 써 내려간 제헌 헌법은 억만년의 터가 아니라 몇 년의 터로 전락하였지만 진정한 대한민국 억만년의 터는 서울에서 지방으로 피난 간 양질의 엘리트들이 주도하는 새로운 기풍이 전후 새로운 세대들에게는 자양분이 되고 화수분이 되어 우후죽순 마냥 초토화된 국토 여기저기에서 꽃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