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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해 록] 백년전쟁 59, 북송北送 1959

by 윤해


전쟁은 인명과 재산의 손실을 담보로 하여 돌아간다. 손실된 인명과 재산은 사회의 흐름을 촉진시키고 촉진된 흐름은 경기를 자극하여 불황을 활황으로 바꾸는 전시경제를 만들어 피로 이루어낸 호황을 살아남은 자들은 누리는 역설적 상황을 만난다.

망국의 암울한 상황에서도 외교를 통한 대일 독립전쟁을 일제가 망하는 그 순간까지도 라디오 방송을 통해 중단 없이 계속했던 우남은 해방정국의 혼란 속에서 반공전선의 도구로써 잠시 일제부역자들을 이용하기는 했어도 건국 후 대일강경 외교로 일관하면서 일본에 대해서는 그 누구보다 강압적이고 고압적이었으며 단호했다.

누란의 6.25 전쟁 중에 나라가 적화되기 일보직전일 때 도쿄 극동사령부가 일본의 병력을 동원하려고 시도하였을 때 우남은 그 즉시 총부리를 돌려 일본부터 몰아내겠다고 일갈하였고 특히 한반도 바다에 통상적 영해를 훨씬 뛰어넘는 평화선, 일명 이승만 라인을 그어 영해를 침범한 일본어선에게는 조금의 자비도 없이 나포하고 구금하였다.

이러한 반공에 투철하고 일본에 단호한 우남을 악마화하고 친일로 몰아가는 매국세력의 기만이 지록위마指鹿爲馬이며 흑색선전黑色宣傳의 전형인 것이다.

1959년 2월 13일 일본정부는 재일교포의 북송을 정식으로 발표하였고 대한민국 정부의 저지와 항의, 비난과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 해 12월 14일 북송교포 제1진 975명이 일본 니카타에서 북한 청진으로 향하였다. 재일교포 북송사업은 이후 1984년까지 진행되면서 93,340십 명이 북한으로 들어간 비극적 사건이다.

6.25 전쟁 휴전회담 중에도 한 명의 국민이라도 자신의 의사에 반하여 북한으로 돌려보내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로 세계패권국의 수장 아이크와 처칠과 정면으로 부딪히면서까지도 단행된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신의 한 수는 단순한 정치와 국익의 도모뿐만 아니라 체제의 미래까지도 내다보며 애민愛民한 우남의 결단이라면, 1959년 일본의 재일동포 북송사업이야말로 일본과 야합하고 부역하면서 6.25 전쟁에서 소모된 노동력을 손쉽게 취하고자 했던 6.25 전범이자 독재자의 전형적인 친일매국행위이며 무엇보다도 동포를 도구화 선전화하는 유물사상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재일교포 북송사업은 교묘하게 일본정부가 뒤로 빠지고 적십자사를 통한 민간사업으로 위장하면서 만경봉호를 타고 니키타 청진 바닷길을 가로질러 6.25 전쟁 당시 귀중한 우리 국민 10만여 명을 흥남에서 무사히 탈출시킨 국민들 숫자만큼의 재일동포를 북한으로 북송시켰다.

1908년 1월생은 고향의 학생들에게 보다 나은 교육기회를 주기 위해 경향각지 백방으로 뛰면서 노심초사勞心焦思와 분투노력奮鬪努力을 아끼지 않던 중 재일교포 북송 소식을 듣고 가슴이 내려앉았다.

거악의 일제강점기 함흥과 흥남에서 자강 하기 위해 몸부림치면서 후학을 길러내었고 그렇게 길러낸 함경도의 제자들은 6.25 전쟁의 비극 속에서도 피난민에 섞여 흥남항을 떠나 동해를 거쳐 거제도에 안착함으로써 기적적으로 자유진영의 품에 무사히 안겼으나 일본과 가까운 경상도, 제주도에서 건너간 미귀환 재일동포들이 일본정부와 북한 사이에 적십자라는 허울만 그럴듯한 포장과 북한 독재자의 기만과 사탕발림에 속아 연고도 없는 함경도 청진의 공산진영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1959년 북송의 시작을 보면서 선동에 넘어가고 세뇌에 절여진 망국과 전쟁 그리고 냉전 중인 한반도 백년전쟁이 낳은 역설적 비극 앞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 눈시울이 붉게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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