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자생물학적 관점에서 인류는 우주의 한 점이 아니라 그 자체로 소우주이다. 문명사적 관점에서 호모사피엔스는 소우주가 숨 쉬는 지체, 뇌와 손이 공진화하면서 그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그 끝은 창대하리라 라는 욥기 8장 7절의 말씀과 같이 미립자로 시작한 우주가 빅뱅을 거쳐 그 끝을 알 수 없는 지금의 팽창하는 우주가 되었듯이 도대체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처럼, 도무지 어디까지 갈지 모르는 과학문명의 이기들처럼 일시무시한 문명의 저 끝으로 우리를 데려가고 있다.
과거의 우리가 지금의 우리를 예상할 수 없듯이 지금의 우리가 미래의 우리를 상상할 수 없는 문명의 반감기는 점점 짧아져 가고 어느 시점에서 보면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문명의 종말이 기다리고 있고 그 종말은 또 새로운 문명의 시작점에 불과하다는 것이 반복되는 문명을 이루고 사는 인류의 운명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미래를 유토피아로 그리던 디스토피아로 그리던 그것은 호모 사피엔스라고 하는 개별인류의 선택이며 그 선택의 중심에 무언가를 발명하고 개발하며 만지작 거리고 있는 손이 있고 그 손놀림에 따라 춤추는 뇌 안의 시냅스가 우리의 미래를 유토피아로 연결할지 디스토피아로 연결할지를 결정한다고 보면 큰 무리가 없지 않을까?
1949년 영국의 소설가 조지 오웰이 발표한 소설『1984』는 현대 사회의 전체주의가 도달하게 될 그 끝을 예측한 소설이다. 1984년, 세계는 오세아니아, 유라시아, 동아시아 세 국가에 의해 분할 통치 되고 있다. 윈스턴 스미스는 오세아니아의 한때 영국이라 불렸던 지역에 사는 하급 당원이다. 사람들은 사무실에서도 집에서도 24시간 송수신이 가능한 ‘텔레스크린’에 감시당하고, 사생활과 개인 공간이라는 말은 이 세계에 존재하지도 않는다. 어느 날 그는 가게 진열장에 놓인 공책에 홀리듯 매료되어 그것을 구입한다. 그리고 방 안 구석 텔레스크린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유일한 공간에 앉아 이제까지는 상상만 해왔던 그 일을 하기로 결심한다. “1984년 4월 4일.” 그것은 바로 일기를 쓰는 것이다……라는 내용의 1984는 우리 인류가 비록 디스토피아적 문명의 도구에 의해 우리 스스로를 가두는 우리, 가두리에 갇혔지만 결국 가두리에서 탈출하는 것도 손과 뇌의 공진화의 역순을 밟아야 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윈스튼 스미스의 각성이 보여준다.
1984년은 1884년 12월 4일 삼일천하로 끝난 갑신정변이 시작된 우정국 낙성식 이후 한국우정 100주년이 된 시점이었고, 갑신정변의 쿠데타 중에 칼을 맞은 조정의 실세를 죽음에서 구해낸 개신교의사 알렌이 입국한 해를 기준 삼아 한국 기독교 100주년을 기념한 해이기도 하다. 또한 이해에는 미국 LA에서 하계올림픽이, 유고슬라비아 사라예보에서 동계올림픽이 개최되었는데 특히 LA 하계올림픽에서는 소련 등 사회주의 국가들이 대부분 불참하여 반쪽짜리 대회로 전락하였다. 한국은 이 대회에서 종합 10위를 달성하였다. 한국은 이 해를 기점으로 하여, 합계 출산율이 2.0 명 미만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당시 합계 출산율은 1.74 명이었다.
1908년 1월생은 24세로 순국한 동갑내기 1908년 6월생 매헌이 겪지 못하고 볼 수 없었던 반세기의 격동을 지나 1949년 조지 오웰이 그린 미래 1984년을 마주 하면서 형언하기 어려운 감개무량함을 느끼고 있었다. 1884년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친 김옥균을 위시한 혁명가들도, 민 씨 척족들과 을사오적과 같은 매국세력을 등에 업은 혼군 고종의 감옥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난 우남도 망국의 식민지 청년으로 태어나 조국근대화와 산업화의 제단에 자신을 바친 박정희를 비롯한 식민지 청년세대도 모두가 인생의 무대에서 사라져 간 1984년, 자신과 같은 역사의 질곡을 온몸으로 받은 세대야말로 인생 칠십 고래희와 같이 살아남아 번영된 대한민국의 모습을 두 눈으로 보기는 세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1984년 6월 27일 88 올림픽고속도로가 개통되었다.
분단된 남북 종축은 경부 호남 고속도로가 이미 1970년대 개통되어 산업화의 혈맥이 되어 흐르고 있었지만 동서 간의 횡축은 산맥과 강과 같은 자연 장애물뿐만 아니라 인위적 교류가 미미하여 늘 도로개발에서 우선순위가 밀렸지만 신군부 집권과정에서 야기된 유혈사태의 무마책으로 동서 간의 화합과 교류문제가 화두로 떠오르고 때마침 평화의 제전 88 올림픽을 유치하면서 1984년 6월 27일 개통한 고속도로가 88 올림픽고속도로였다.
인생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여행이다. 1908년 1월생은 비록 조지 오웰이 1949년에 바라보았던 1984년을 디스토피아적 현실로 그리고 있었지만, 자신이 팔순을 바라보며 살아왔었던 인생의 과정 하나하나가 비록 디스토피아였고 비극적 전쟁으로 점철되었다 하더라도 다시 한번 노구를 이끌고 손을 들어 지팡이를 집고 머리를 들어 모자를 쓰면서 파란만장하게 달려온 한 생을 정리하는 마지막 여행길에 올랐다. 24세의 나이로 독립전쟁에서 순국한 동갑내기 1908년 6월생 매헌은 그렇게 오매불망 보고 싶었으나 볼 수 없었던 독립되고 건국된 대한민국 번영의 현장을 매헌을 대신하여 반드시 보고 말겠다는 일념 하나로 1908년 1월생은 그 해 여름 개통된 88 올림픽 고속도로를 거쳐 남원을 지나 여천석유화학단지를 살펴보고 여수항에서 부산항까지 쾌속선을 타고 국토의 동서를 가로질러 남해안 동해안의 공업단지들을 둘러보았다.
1908년 1월생은 자신이 그토록 가고 싶었던 북녘땅 명사십리 원산만에서 흥남 함흥까지는 통한의 휴전선이 가로막혀 갈 수 없었지만 그래도 북한과의 체제전쟁에서 GNP 규모 5배의 격차를 벌린 1984년 대한민국의 번영된 모습과 미래를 확신하였고, 평생 꿈에서도 잊지 않았던 먼저 간 식민지 청년들의 한 생안에서 숨 쉬고 염원했던 대한민국은 조지 오웰이 예상한 소설 속의 디스토피아라기보다는 현실 속의 유토피아에 더 가깝다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는 알 수 없는 만족감으로 가슴이 벅차오르는 느낌을 거두기가 힘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