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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해 록] 백년전쟁 99, MCMXCIX 1999

by 윤해

로마자 MCMXCIX를 아라비아 숫자로 변환하면 1000+(1000-100)+(100-1)가 되어 1999년이 된다. 말과 글로 문명을 일으켜서 실상의 자연을 허상의 세상으로 바꾸어 버린 우리 인류가 허상이라고 하는 세상에도 실상의 섭리까지는 아니어도 허상에도 엄연히 원리가 존재하고 있다는 일종의 인간이 만든 가상세계라고 하는 게임의 규칙이 필요함을 깨닫고 만든 것이 수학의 세계이다.

수학을 만들고 나서야 비로소 인간이 만든 세상이라는 가상세계의 원리는 물론 질서까지 정교해졌고 자연에서 빠져나온 사람은 몸과 더불어 뇌가 만든 가상세계, 세상 속의 인간으로서 재탄생하게 되었으며 처음에는 말과 글을 발명하여 자연의 섭리를 해석하다가 점점 더 뇌의 시냅스가 촘촘히 연결되면서 인간이 만든 세상은 자연을 듣고 만지는 단계를 넘어서서 새로운 가정을 바탕으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환상의 세계로 진입하였다. 그러나 자연의 섭리를 듣고 만지면서 배운 인간은 환상을 추상으로 추상을 구상으로 바꾸는 보다 정교한 가상세계가 필요했고 그 가상세계의 원리를 설명할 숫자로 이루어진 수학의 규칙적인 법칙이 절실하지 않았을까? 지레 짐작해 본다.

9가 세 개 겹치는 1999년은 노스트라다무스가 예언한 종말의 시간처럼 무거운 무게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망국과 독립, 건국과 전쟁, 산업화와 민주화를 통해 숨 가쁘게 달려온 한반도 백 년의 일상은 일상이 전쟁이요 전쟁이 일상인 백 년을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세기가 시작되자마자 망국의 식민지로 시작된 우리가 죽을 고생을 다해 독립전쟁 만주사변 중일전쟁 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살아남았고 산업화를 통해 번영하였으며 민주화를 통해 비로소 국민에게 주권이 돌아왔지만 분단과 분열은 협상력의 약화를 가져왔고 세계패권질서는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다이내믹 대한민국을 좌시하지 않았으며 백 년의 시간에 걸쳐 이루어낸 소중한 자산은 하루아침에 외국으로 넘어가는 또 다른 형태의 경제 식민지가 된 채 1999년을 지나고 있었다.

독립과 망국 사이의 을사조약만큼이나 번영과 몰락 사이에 IMF 구제금융을 불러들인 외환위기는 대한민국을 송두리째 바꾸고 있었다. 망국의 을사년에 을사오적이 있었듯이 외환위기의 혼란을 틈타 국가와 국민을 배신하는 매국세력들은 어김없이 준동하며 자신의 사익을 챙기고 국민들을 도탄에 빠지게 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기업과 금융이 무너지는 와중에 수많은 빅딜과 스몰딜이 있었고 그러한 거래와 야합 사이에서 선공후사했던 수많은 국민들은 나라를 살려보겠다고 애들 돌반지까지 들고 나와 금으로 달러를 바꾸어 외환을 충당하여 위기를 넘기고자 했으나 사악한 매국무리들은 금 지급금 정책을 악용하였다. 재벌로 대표되는 대기업 일부는 국가 전체가 누란의 위기에 내몰려서 국민들이 어떻게든 국가를 살리겠다고 모은 금을 헐값매각을 통한 금 수출입을 통해 부가세 탈루를 추진하다가 애국적인 국세청 법무팀장에 의해 적발되기도 하였다. 당시 적발된 대기업은 총 7개사로 LG상사, SK상사, 삼성물산, 현대종합상사, 한화, LS니꼬동제련, 고려아연(영풍)이다. 대기업 중에서도 최상위 기업이 5개나 포함되어 있었고 금을 헐값에 팔아 국제적 호구가 된 것뿐만 아니라 재벌들이 자기들 사익을 챙기겠다고 범죄 행위까지 한 것이다.

본래 금 모으기 운동의 취지는 기업이 수집한 금을 예탁받은 뒤 예탁증서를 발급하고 예탁기간이 끝난 뒤 수익을 배분하는 골드뱅크 업무였다고 한다. 즉 금을 외환보유고로 확보하여 신용도를 확보한 뒤 외국에서 돈을 빌려 유동성 문제가 해결하면 정부가 구제금융을 통해 기업의 빚을 갚아줄 수 있고 이후 경제가 정상 궤도에 오르면 기업에 수익을 배분하고 기업은 수익금으로 구제금융을 변제하는 식이다. 하지만 한국은행에서 모인 금을 수집하여 외환보유고로 활용하려고 했으나 기업들은 모인 금을 수출하여 수출실적로도 사용하고 외채도 갚으려다 보니 남은 금이 부족했다고 한다. 한국은행은 모인 금 가운데 겨우 3.04t만을 확보하였다고 한다. 당시 한국은행이 보유하고 있던 금의 양이 13.4t에 불과했다는 걸 생각하면 이것도 매우 많은 양이기는 하지만 227t의 금을 모두 한국은행에 집중해서 외환보유고로 전용하려 했으나 그러지 못한 점은 아쉬울 수밖에 없다. 특히나 금은 안전자산으로 유사시 최종결제 수단이라 IMF 외환위기와 같은 비상사태에서 더더욱 빛을 발하고 IMF 외환위기가 진정된 다음 금 시세는 급등하였으니 이때 계획대로 일이 진행되었다면 한국의 국익에도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1999년 정치권에서는 김대중 정부 출범 1년이 된 시점부터 조폐공 파업유도사건, 옷로비사건, 통합방송법 파동, 홍석현 구속 등 고위 공직자들의 비리 사건으로 온 나라가 떠들썩거렸으며, 특히 법조계에서 1999년은 흑역사로 기억되는 해인데, 연초부터 대전 법조비리 사건이 터지고 검찰 초유의 항명 파동이 일어나더니, 그 유명한 옷로비 사건이 터졌고, 급기야 연말에는 전직 검찰총장이자 법무부장관이 구속되는 초유의 사태까지 벌어진 거다. 특히 검찰과 관련하여 여러 불미스러운 사건이 많이 일어나서 검치檢恥의 해라는 별칭마저 붙어버렸다. 사회적으로는 화성 씨랜드 참사, 인천 인현동 호프집 화재, 신창원 체포, 고문기술자 이근안 자수 등으로 큰 이슈가 되었고, 하반기에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 당시 참전 미군들의 증언이 AP통신에 보도되면서 6.25 전쟁 당시 미군의 양민학살 논란이 다시금 수면 위로 떠올랐다. 남북관계에선 제1 연평해전과 금강산 관광객 억류사건이 터져 악화될까 싶었지만, 남북통일농구대회 개최 등으로 화해 흐름을 계속 이어갔다. 교육계도 큰 변화가 일어나 이해찬이 1999년에 교육부 장관으로 임명되면서 고교 교육 정상화라는 허울을 쓰고 특기 하나만 있으면 대학에 갈 수 있는 무시험 대학 전형으로 대입제도를 변경했다. 하지만 1983년생 들이 응시한 2002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은 학생들의 점수가 폭락하는 결과를 초래하였고 결국엔 이해찬 세대라고 불리며 "단군이래 최저학력"이라는 오명과 함께 합법화된 전교조 교사들에게 교육받은 세대로서 가치관과 이념관 그리고 국가관이 판이한 세대를 배출함으로써 대한민국의 첨예한 세대갈등의 출발점이 이 시기에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이 해는 새천년의 기대와 함께 Y2K에 대한 공포도 동시에 느꼈던 시기였다. 연도별 숫자가 두 자리 이상의 기준으로 00년이 2000년이 아닌 1900년으로 오기된다던가, '아예 2000년이라는 연도를 인식하지 못할 것'이라는 공포와 전기, 전력 등에 의존하는 시설들을 중심으로 연도 숫자 오류로 잘못되는 것이 아니냐는 공포가 확산되었다. 그러나 막상 2000년 1월 1일이 밝아오면서 우려하였던 그런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다.

비록 문명이라고 하는 가상세계를 우리가 살고 있다 하더라도 그 문명의 원리는 수학의 세계에 의해 정교하게 정의되고 그렇게 질서 정연한 숫자는 논리 정연한 글로 치환되면서 가상의 원리가 실상의 섭리로 되돌아오곤 한다. 이렇게 자연과 세상은 섭리와 원리로써 돌고 돌며 순환하고 반복한다. 다만 개별인간의 시간과 우주의 시간이 찰나와 억겁으로 다를 뿐이다. IMF때 준동했던 매국세력들은 망국의 을사오적의 재림이었으며 한반도 백년전쟁의 위기 때마다 그들 매국세력은 선사후공의 모습으로 공동체가 돌아가야 할 다리를 불사르고 자신의 사익을 충분히 챙길 대로 챙기고 그냥 사라지지 않고 가장 순수하게 공동체를 위해 노력하고 자기 한 몸을 희생한 선공후사의 애국자들을 십자가에 매단 뒤 다음 판을 기약하며 유유히 국민들 속으로 숨는다.

반복된 매국세력의 준동은 한반도 백년전쟁에서 적전분열의 장본인들이며 국민들을 갈가리 찢어 서로 반목하게 하여 자신들의 사익을 극대화하면서 백 년 동안 진화한 대한민국의 피를 빨아먹는 뱀파이어와 같다. 을사조약, 한국전쟁, IMF, 금융위기 그리고 두 번의 탄핵 정국에서 그들의 모습은 진화되었고 세련되게 바뀌었으나 본질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그들의 그림자에서 을사오적과 같은 매국노의 모습이 촛불처럼 어른거린다. 1999년 새천년이 오기 전에 지난 백 년의 앙금을 풀고자 했지만 백년을 진화한 한반도 매국이적세력의 뿌리는 새천년까지 질기게 반복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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