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은 백 년도 못 사는 인간으로서 아득한 숫자다. 영어로는 Two tripple Oh, 또는 축약해서 'Y2K'라고 한다. 여기서 Y는 year, 2K는 2000(2+kilo)을 의미한다. 어쩌면 인류 역사상 새천년을 마주하면서 천년이라는 시간을 실감해 본다는 것 자체가 행운이다.
그러나 새천년이 시작되었을 뿐 20세기가 끝난 것은 아니다. 인류역사상 가장 많은 인간들이 전쟁으로 죽어나간 20세기는 2000년 12월 31일까지 질기게 남아 있었다. 세기가 교차하고 새로운 천년이 열리는 2000년은 미국과 대한민국에 형성된 IT버블이 꺼지면서 파산자가 속출한 해이기도 하다. 2000년 미국 S&P500 지수는 10.5%의 하락률을 기록했고, 한국증시는 미국보다 훨씬 더해서 코스피가 연초보다 52%, 벤처기업 중심인 코스닥은 80% 하락한 채로 마감하여 세계 1위의 하락률을 기록했다. 증권 투자자들 중에서 IT버블 붕괴로 인한 주가폭락 때문에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많았다. 사회적으로는 의약분업을 골자로 한 개정 약사법 시행을 앞두고 의사들이 분노해 병원을 닫아가며 시위를 해 의료체계에 큰 혼란이 있었다.
지난해부터 미군의 노근리 양민학살 의혹과 매향리 미군사격장 피해, 주한미군의 한강 독극물 방류 사태 등이 불거지면서 '반미'가 이슈로 불거지기 시작했고, IT 분야에선 인터넷 시대가 피부에 와닿기 시작한 첫 해이기도 하다. 1999년 3월 31일에 시작된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가 이해에 점차 정착되기 시작하였고, 기존의 PC통신 동호회를 대체하는 인터넷 커뮤니티 서비스가 급속도로 확대되었다.
2000년 6월 15일, 1945년 남북분단 이래 사상 최초로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하여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가졌고 6.15 남북공동선언이 체결되어 남북한 공식적인 화해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같은 해에 남북 이산가족 상봉과 호주에서 열렸던 2000년 시드니 하계올림픽에서 남북한 선수단이 동시입장을 하는 등 남북관계가 극적으로 가깝게 된 해가 이해이기도 했다.
허장성세虛張聲勢라는 말이 있다. 실속은 없으면서 큰소리치거나 허세를 부리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2000년 6월 13일 평양 순안공항에 내린 김대중을 김정일이 손을 맞잡는 상징적인 장면에서 55년간의 분단의 질곡을 넘어서는 듯한 착각을 한민족에게 들게 했지만 그 모든 것이 남북한 당사자들의 철저한 계산에 입각한 허장성세였음이 밝혀지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마주 보고 말을 나누는 대화가 어렵다는 것은 대화가 화자의 수사학이 아니라 청자의 심리학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공산주의자와의 대화가 어렵다는 것은 그들의 대화는 수사학만 존재할 뿐 심리학이 들어설 여지를 말살한 체제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미 세습왕조를 완성하고 인민들을 압살 하며 핵이라는 절대반지를 오로지 왕조의 보위만을 위해 개발하겠다는 절대 의지를 가지고 있는 상대와의 대화는 대화의 탈을 쓴 야합에 다름 아니었다. 마치 무대장치를 방불케 하는 치밀한 동선과 엑스트라까지 그날의 주연을 위해 동원된 수많은 배역도 무색하게 그들이 내놓은 6.15 공동선언의 그 어느 한 줄에서도 과거를 반성하고 새로운 출발을 시작하는 구체적 문구 한 자 없이 남북은 뒤에서 주판알과 계산기를 두드리는 반민족 행위를 서슴없이 하고도 파안대소를 하면서 한반도 백년전쟁에서 가루가 되어 불꽃처럼 산화해 간 순국선열과 애국지사 그리고 전몰장병들의 영전에 대못을 박고 그들이 그렇게 민족의 제단에 바친 한 생명 하나하나의 무게를 깃털처럼 가벼이 날려버리고 천진난만한 웃음으로써 그들을 두 번 파묻는 반민족 행위를 하고도 한가하게 즐거워하면서 실속은 없고 큰소리치면서 허세로 가득 찬 허장성세의 선언문을 그저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대화가 화자의 수사학이던 청자의 심리학이던 대원칙은 꿈을 공유하는 것이다. 동상이몽 하면서 남북간 대화의 물꼬를 텄다고 주장하는 자들에게 한마디 해주고 싶다. 그것은 대화의 물꼬가 아니라 야합의 물꼬였으며 야합은 대화로 나아가지 못하고 거래로 달려갔으며 거래의 종착지에서 남북은 서로 주고받을 것이 없을 때 파국이 되어 도로 원수가 되어 있는 지금과 마주한다.
2000년 12월 28일 한미 양국은 SOFA 개정협상을 타결하였다. 통계청은 이날 발표한 <2000 인구주택총조사 잠정집계결과>에서 한국의 인구는 총 46,125,000 명, 총 가구수는 14,318,000여 가구, 주택 수는 11,493,000호로 집계되었다. 12월 31일
이 날 23시 59분 59초가 20세기와 제2천년기의 마지막 순간이었다. 그렇게 격동의 20세기와 아득했던 제2천년기가 저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