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6.03
주객전도의 세상을 살고 있는 우리, 분명 세상은 인간을 근본으로 하는 인본주의 세상에서 살아야 함에도 우리는 우리가 원하던 원하지 않았던 자본주의 세상이라는 때를 만나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다.
도구와 수단이 본질을 지배하는 세상을 만났고 그나마 그 세상이 그래도 인류가 살아왔던 세상 중에는 가장 합리적이라는 믿음 하나로 열심히 노력하여 그 세상에 적응하려고 발버둥 치는 것이 우리가 걸어왔던 자화상이다.
재불차 문불차 인불차 이 삼불차야말로 사화를 피해 낙향하여 주실마을에 정착한 한양 조씨의 자존심이자 때를 잃은 그들에게 합목적적 생존전략이었을 것이다.
시대를 잘못 만나 뜻을 관철시키지 못하면 낙향하여 후일을 도모하는 역사적 전통은 유교중심의 성리학적 세계관을 살아가던 선비들의 생존전략이며 여말선초 야은 길재가 선산 금오산에 은거하여 영남사림을 길러낸 이후 조선 오 백년의 통치이념을 둘러싼 사림파와 훈구파간의 내전의 결과인 지도 모른다.
그러한 갈등이 평화적인 세다툼으로 이어지면 붕당정치요 사색당파라고 부르고 혼군을 만나 왕권강화의 도구로 이용되면 피비린내 나는 내전, 사화가 시작되는 것이다.
삼족을 멸하는 사화는 사대부에게는 가문 전체의 멸문으로 이어지고 이 멸문지화를 피하기 위해 강보에 싸인 핏덩이 하나를 어린 여종에게 건내고 후사를 도모한 사례도 영남 사림의 낙향 선조에게는 흔하디 흔한 비사이기도 하다.
때를 잃어 사화를 당해 낙향한 이에게 적합한 장소가 지금도 경상도의 오지인 봉화 영양 청송이다. 깊은 산골일수록 그들의 생존확률은 높아지고 그 생존을 기반으로 후일을 도모할 가능성도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그들의 뜻을 벼르고 벼를 온전한 공간을 가지고 인간을 길러 훗날의 시간을 도모 하는 것이다.
사화로 미쳐 날뛰는 세상이 조금 잠잠 해지면 사림의 후손들은 오지에서 빠져 나와 조금 더 대처인 영주 안동 선산으로 나와 가문을 정비하고 제자를 양성하면서 본격적으로 누구는 재차 중앙정계로 진출하여 뜻을 펼 준비를 하고 누구는 산수경계 좋은 서원에 은거하여 학문을 갈고 닦기도 하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의 정체성은 영남 사림의 치열한 생존전략의 반복과도 이어져 있을 지도 모른다.
절대 빌리지 못한다는 것으로 재물과 글과 사람이라고 후손들에게 강조한 주실 조씨들이 빌려도 되는 것은 무엇인지 상상해본다. 짐작해 보면 그들이 빌린 시간이라는 재화가 약이 되어 멸문의 악몽을 치유하고 세대를 넘어 후일을 도모하는 영남사림의 선비정신이 그나마 우리가 소중히 기억해야할 노블레스 오빌리제의 모습 이라고 우겨보며 도산서원의 이원화된 입장료가 님비화된 자본주의의 어두운 단면이라고 주장 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