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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하유지향, 무위자연의 이상향

by 윤해



2024.06.04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곳 하려 함이 없는 스스로 그러함이라는 무위자연의 이상향 무하유지향은 도대체 어떤 곳일까?

공간만 보면 시간을 놓치고 시간만 보면 인간을 놓친다. 우리는 무언가를 보기 위해 또 무언가를 고정시켜야 하는 존재로 태어났다. 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자르는 것이다. 연속된 영상물도 수많은 스틸사진을 이어 붙인 것에 불과하듯이 우리가 살면서 무엇인가를 보고 확인하는 행위는 대부분 스틸사진을 붙이고 잇는 행동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엇을 보는 아주 단순한 일도 스틸사진과 스틸사진 사이의 눈 깜짝할만한 순간 사라지는 여백을 보지 못하는 숙명을 타고난 인간으로서, 지구 나아가 우주라는 공간의 광활함을 느끼기에는 역부족이며 결국 우리는 환상만을 보며 간을 보고 평가하며 울고 웃는 희로애락 오욕칠정의 프리즘 안에 삶을 영위할 뿐이다.

무위자연의 대척점에 있는 말이 무소불위다. 무위자연이 지구와 우주를 창조하는 거시적 개념이라면 무소불위는 자연과 인간을 파괴하는 미시적 개념이다. 무위자연이 창조한 지구와 우주는 볼 생각을 못하고 인간들이 다투며 만든 세상에서 서로 잘났다고 보잘것없는 한 줌의 권력을 휘두르며 주변을 파괴하는 무소불위의 힘을 달라고 간청하는 오지남의 오지랖을 보고 일갈하는 무명인의 모습에서 미시와 거시 사이의 아득한 안목차이를 실감한다.

세상이 싫어 3 둔 4 가리의 오지를 찾아 무위자연의 강과 하늘을 벗 삼아 놀아도 마음 한구석 헛헛한 기운을 이기지 못해 무명인에게 하소연해보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사심만빵을 버리고 담담한 마음과 막막한 기를 가지라는 무명인의 한결같음 뿐이구나

거시의 자연에서 노니는 무명인의 눈으로 보면 미시의 세상에서 허덕이는 인간군상의 처지가 한없이 야비하게 보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자연으로 돌아가기 전까지는 발을 디디고 함께 사는 인간의 냄새가 그리운 것도 사실이다.

무위자연의 이상향 무하유지향이 비록 무릉도원과 같은 모습으로 다가올지라도 지금 여기 살을 부대끼고 사는 인간 세상에서 질서를 세우고 의를 이루는 일도 소홀히 해서는 안될 일이다.

무명인의 말마따나 야비하고 철면피인 선사 후공의 인간을 피해 부끄러움과 창피함 정도는 느끼고 살짝 얼굴을 붉히는 수줍게 다가오는 사람들이 모여사는 세상에서 다만 살고 싶을 따름이며 그곳이 우리가 세상에서 찾던 무하유지향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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