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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소품, 미니멀 라이프

by 윤해



2024.05.26

시대를 불문하고 작가는 배고프다. 자기 배만 고픈 게 아니고 작가의 글은 빈곤 바이러스가 되어 식솔에게 감염되어 온 가족이 허덕인다. 가난에 빠진 작가가 배를 곯을수록 작가의 의식은 더욱 맑아지고 머리는 자기도 놀랄 정도로 명료해진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난이 자신을 덮치고 가족을 덮칠 때에야 비로소 주변의 사람들의 진면목이 하나둘씩 드러나고 시험에 든 인간 군상들의 오만가지 에피소드가 봇물처럼 터진다.


잘 먹고 잘 살 때는 그저 오늘 하루 즐겁고 행복한 게 없냐고 투정 부리기 일쑤지만 가난이라는 재앙이 밀려오면 하루를 살아내기 위해서는 평소에는 하지 않아도 될 일을 참 많이 하고 돌아다녀야 한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고 나라도 그렇다. 나라 경제가 순탄히 돌아갈 때는 어린아이 반찬투정 하듯이 더더더를 외치는 수많은 단체들의 해괴한 구호가 난무하지만 그들로 인해 나라가 망할 때쯤이면 녹슨 식칼이라도 하나 들고 일어서는 위인이 하나 없는 형국이다. 마치 도둑이 들 때면 개도 짖지 않는 이치다.

나라는 개인이나 나라라는 국가도 칠십을 넘기면 내부로부터 공격을 당하게 되어 있다.


개인은 그동안 꾸역꾸역 어찌어찌 우주와도 같은 인체를 지켜내었던 면역체계가 피로파괴의 지경에 내몰리게 되고 한 국가도 70년을 넘어가면 건국초기 망국의 백성으로 살면서 가난에 빠진 식솔들 마냥 국내에 있으면서 온갖 핍박을 받거나 해외로 떠돌며 유랑하여 맷집과 견문을 넓힌 선각자들의 피눈물 나는 노력 덕분에 나라의 기틀을 잡고 외교와 국방, 그리고 산업을 일으켜 지금 여기까지 달려왔고 그 결과가 지금의 대한민국이다.

개인도 가난에서 벗어나면 가난했던 시절을 깡그리 지우고 신분세탁을 하듯이 국가도 부유해지면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쳤던 건실한 기상은 다 어디로 가고 지금의 처지로 과거의 몸부림을 단죄하는 지경에까지 내달린다. 이것이 개인이나 국가나 나이가 들었다는 증거다.

나이가 들어 혈관에 기름이 끼면 피가 쌩쌩 돌지 않아 장기가 원활히 작동하지 않고 그 결과 머리도 무거워 제대로 된 판단을 못하듯이 나라도 선진국에 가까이 가면 개별세포인 국민이 하나같이 참지 않고 들고 일어서서 언로가 과부하되어 막히고 일하는 사람은 없고 부가가치 창출은 간데없고 눈먼 세금을 가지고 이전투구하는 집단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바라만 볼 수밖에 없는 선진국병을 앓는 것이다.

소박한 책상 위에 문방사우에 더해 피다 남은 아리랑 담배와 밥그릇인지 모를 재떨이 그리고 유일하게 세상과 연결되어 있는 손목시계 하나가 글이 떠오르지 않아 지쳐 쓰러진 고단하고 가난한 작가의 방에 덩그렇게 놓여 있다.

어쩌면 문명으로 시작된 세상역사의 정반합이 여기서 출발하는지도 모른다. 모든 구질함을 지우고 미니멀 라이프를 실천하며 오로지 펜 하나로 세상을 바꾸어 보겠다는 처연한 결기가 사화를 당해 낙향하고 후일을 도모하는 사림과 검남의 모양새가 떠오르는 것은 나만의 착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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