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상과 허상 사이에서 환상을 보면서 우리는 한 생을 살아낸다. 누구는 내가 본 환상이 실상이라 우기며 실상의 그림자와 같은 허상을 믿어 의심치 않고, 누구는 환상은 환상일 뿐 평생 환상을 쫓다가 자기가 본 것이 허상임을 깨닫고 내려놓을 것은 내려놓고 홀가분하게 한 생을 이어간다.
이것은 마치 진리를 구하기 위해 섭리와 원리 사이를 헤매고 진아眞我를 찾기 위해 경아鏡我에 빠지는 것과 진배없으며 커피의 오묘한 맛을 즐기려고 원두가루를 거름종이에 내리면서 핸드 드립커피의 맛을 보려다 맹물처럼 맛없는 커피에 실망하는 것에 비유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이처럼 문명은 단계와 과정을 복잡하게 만들어 단계와 과정 사이사이에서 부가가치를 창출하면서 그 부가가치 만이 인생에서 중요한 가치라고 끊임없이 세뇌하여 가치관을 왜곡시키고 진리 앞에 서지 못하게 하며 섭리에 귀를 막고 원리에 기대게 하면서 원리가 만들어낸 거울 같은 나의 모습, 경아鏡我로써 진정한 나의 모습인 진아眞我를 가리는 것이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너무도 당연한 말이 법문으로 회자되는 것도 있는 것을 그대로 보지 못하는 세상 속의 인간을 향한 깊은 울림의 반향일 것이다.
1,200년 전 지리산에 들어가 쌍계사를 창건한 진감국사를 기리는 비문을 쓴 최치원이 진감국사 비문에 쓴 ‘호중별유천지壺中別有天地’, 호로병 한가운데에 별천지가 있다는 말이 무엇이었을까? 천지는 무엇이고 별천지는 또 무엇일까? 왜 호로병 안에 천지가 있다고 했을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이 든다.
부처님이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득도하고 열반하면서 가르침의 종교가 아닌 수행의 종교임을 그렇게 강조했지만 진리를 향한 구도의 길은 어렵고 가르침을 귀로 듣는 섭리를 이해하며 구도에 다가간 기분을 느끼고 산 중에 세워진 거창한 산사에 기대어 독경을 외우고 천배를 하면서 절에서 절을 하는 것이 쉬워 보이는 것이 인지상정일 뿐 부처님의 불도는 분명코 아닌 것이다.
탈도 많고 병도 흔한 세상에서 진리를 찾는 구도의 길은 어쩌면 우리 자신의 좌표부터 알아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대명천지에서 자유롭게 숨 쉬며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착각을 수시로 하며 살고 있지만 우리의 처지는 최치원이 왕명을 받들어 쓴 '진감선사대공영탑비'의 비문에 들어 있는 호중별유천지壺中別有天地라고 하는 호리병 속에 갇힌 세상 속의 인간에 불과하다는 자각이 어쩌면 눈을 뜨고 구도의 길로 들어가는 출발은 아닌지 한 번쯤 의심해 보자.
사철 푸른 대숲이 바람결에 일렁이고, 봄이 되면 금당을 따라 새하얀 녹차 꽃이 수줍은 듯 고운 자태를 뽐낼 무렵 붉은 매화가 청학루에 한갓지게 기대고, 여름이면 산허리에 감싼 운해가 늙은 소나무에서 솔바람을 일으키며, 가을이면 차가운 달빛이 법당으로 내려와 석탑 위를 어슬렁거리고, 겨울이면 푸른 눈이 대숲 고운 산길에 외로운 발자국을 남길 제 그리움을 더하는 곳이라는 글벗의 표현만 보면 이곳 지리산 쌍계사가 호리병 속의 별유천지인지 아니면 대자연 속의 대명천지인지 헷깔리지만 신라말 대문장가 고운 최치원 선생의 호중별유천지壺中別有天地라는 지적에 이르면 글 이상의 깊이가 느껴지기도 한다.
진감국사 혜소는 당나라 유학을 통해 선, 교, 율, 차 그리고 범패를 들여와 지리산 쌍계사를 창건하면서 무릉도원을 만들었지만 같은 당나라 유학생 고운 최치원의 비문 안에서 호중별유천지壺中別有天地라는 호로병 속의 별천지에 불과했던 지리산 쌍계사가 828년 대렴이 당나라로부터 차나무 씨를 들여와 왕명으로 쌍계사 화개골짜기를 차나무 시배지로 만들면서 시작된 차 문화가 다도가 되고 세월이 흘러 다도의 본산인 지리산 쌍계사에서 차가 아닌 커피를 핸드드립으로 필터에 걸러 마시면서 오오, 이건 뭔가? 지리산 한가운데서 저 멀리 아프리카 케냐의 이름 모를 농원에서 딴 커피 원두가 인도양을 건너고 태평양을 건너 서울로 오고, 오늘 다시 내가 앉은 이곳 녹차밭 한가운데에 자리한 펜션 야외 테이블 위에서 향연(饗宴)을 베푸니, 1,200년 전 처음 쌍계사를 창건한 진감국사인들 이런 호사를 누렸을까 보다고 표현하는 글벗을 보니 지리산 쌍계사는 더 이상 천년의 세월을 호로병 속에 갇힌 호중별유천지壺中別有天地가 아니라 아라비안 나이트의 거인 지니가 호리병을 빠져나온 듯 대명천지 무릉도원처럼 생생하게 나에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