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1.26
본인서명 사실확인서라는 제도가 시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할 허가관청 스스로 인감증명서 제출을 고집하여 할 수 없이 도장을 파야 했다.
먼저 기억을 더듬어 도장 파는 가게를 몇 군데 찾아 나섰다. 결과는 모조리 허탕, 가게가 그대로 존속해도 도장 파는 일은 하지 않았고 대부분 다른 가게는 아파트 재건축으로 가게 자체가 사라졌다. 제도의 변화로 도장 파는 직업자체가 희귀 직업이 된 것이다.
별수 없이 네비힘을 빌어 검색 끝에 5킬로 떨어진 곳에 도장가게를 찍어 차를 몰았다. 웬걸 현장에 도착해 보니 철물점만 확인되고 역시나 도장가게는 온 데 간데없었다. 그래도 오래된 동네로 보여 차에서 내려 아날로그식으로 직접가게를 수소문해보니 다행히 부근에 도장가게를 발견할 수 있었다.
족히 반백년은 되어 보이는 가게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마이크를 잡고 한 곡조 뽑으려는 가게주인의 모습이 들어왔다. 얼른 무명가수에서 도장가게 주인의 대응으로 바뀌어 이름을 물어보고 손때가 묻은 도장 나무틀에 도장목을 거치하고 익숙한 손놀림으로 나무칼 하나 들고 이름대로 각자 하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요사이 도장가게도 보기 힘들지만 기계가 아닌 손으로 이름을 파는 사람은 더더욱 만나기 어려워서 나는 조금은 당황하면서 옆자리 소파에 자리 잡고 앉았다.
기계로는 1분을 넘지 않는 도장 새기는 시간이 수작업을 하면서 10분이 넘어가니 저절로 어색한 침묵이 힘들어 대화가 시작되었다. 88세의 노구의 도장 새기는 노인의 삶, 만주 봉천에서 태어나 네 살 때 엄마등에 업혀 증기기관차를 타고 한반도로 남하해 정착하여 80년을 살아온 노인의 인생은 날것 그대로의 현대 미시사인 것이다.
일단 배를 곯아 우물물에 간장 태우며 허기를 달랬던 청춘의 시절을 지나 안 해본 일이라고는 없을 정도의 억측으로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기르고 틈틈이 노래와 악기로 시름을 달래며 자기를 위해서 수천만 원의 오디오도 지를 줄 아는 어찌 보면 초라한 도장 파는 장인이 내뱉는 독백과 같은 대화에 내 귀가 쫑긋거리기 시작했다.
배고픔을 딛고 생존을 위해 몸부림쳐야 했던 한 사람의 미시사는 그 어떤 스펙다클한 영웅의 서사보다 위대하다. 도장 파는 노인과 나눈 30분 남짓 대화의 결론은 우리나라가 내리막길에 접어 들었다는 일갈이었다. 못 배워서 이유는 모르나 인생역경대학을 나온 야생의 삶 속에서 시비곡직을 넘어 척 보면 누가 사람인지 누가 사람의 탈을 쓴 금수인지는 보인다는 것이다.
구순을 바라보는 도장장인의 손끝에서 바라보는 대한민국은 헤아릴 수 없는 공산주의자의 반란을 이겨내고 외교의 기틀을 쌓은 노구의 천재와 헤아릴 수 없는 비관론자의 방해를 딛고 내일생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분투노력한 수줍은 독재자가 이루어낸 산업단지들과 용광로를 어제 일처럼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책상에서 글로 쓴 역사에는 얼마든지 이념을 넣어 역사를 재해석할 수 있지만 우물물에 간장 타먹으면서 허기를 달래던 구순의 도장장인의 눈에 비췬 그의 미시사는 그저 팩트로 가득 차서 흘러왔고 아무리 설명해도 노인은 이해하려야 할 수 없는 세상에서 어느 교수의 마더 테라피 치료법은 그저 배부른 금쪽이네 가족이 살아가는 이상한 나라 이야기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