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에서 나온 사람이자 세상을 사는 인간으로서 우리는 하루에도 수 없이 헷갈린다. 대명천지에 해가 깔려 깜깜한 것인지 도무지 나이가 들수록 더 헷갈리는 것은 동서남북 네 군데를 보는 사람四覽으로 살다가 그것도 모자라서 전후좌우까지 여덟 군데를 보는 팔람八覽을 하면서 사방팔방을 헤매고 다녀도 세상은 허상에 가상을 더해 요지경 세상으로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면서 근본根本을 흩트리고 기본基本을 무너트리면서 자본資本의 성城이라는 가상의 성城만 높이 쌓아 올리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뿌리가 깊어 근기根氣가 튼튼한 뿌리 깊은 나무가 바람이 아무리 불어서 이리저리 흔들릴 망정 보란 듯이 꿋꿋이 버티어 내듯이 나무에 기생하고 사는 세상 속의 인간도 터를 잡고 사는 기본이 확립되지 않으면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면서 유리걸식流離乞食 하기가 십상이다.
이처럼 나무의 근본은 뿌리에 있고 인간의 기본은 그가 정착한 터에서 버티고 밀려나지 않으려면 그가 벌어들이는 돈, 즉 자본에 달려있다. 나무의 근본은 어떻게 하면 여하이 뿌리가 물을 빨아들여서 줄기와 가지에 있는 이파리에게 물을 공급해 주느냐에 달려 있고, 인간의 기본은 어떻게 하면 정주하고 자리 잡은 터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 돈을 벌고 자본을 확보하느냐가 관건이다.
이러한 근본과 기본은 근기根氣가 되고 근기가 끈기가 되어 실상의 자연을 살아남는 끈기 있는 사람이 되고 가상의 세상에서 사이와 관계를 연결하는 끈기 있는 인간이 되어 공간을 만들면서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는 한 생을 사는 것이 근본에서 나서 기본으로 살면서 자본을 확보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너와 나 우리의 자화상인지도 모르겠다.
근본과 기본이 자본으로 수렴되는 자본주의 세상 한복판에 살고 있는 우리가 돈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고 믿는 것은 가상의 세상에 휩쓸려 실상의 세상을 무시하고 사는 것과 같다. 지구의 생산자 식물이 살아가는 근본이 뿌리에 있고 뿌리는 물을 찾아 뻗어 나가듯이 지구의 소비자 인간도 기본이 그가 정주하고 있는 터에 있고 그 터라고 하는 인간들의 보금자리는 돈을 소비하면서 거기에 서 있기 때문에 보금자리의 기본은 자본일 수밖에 없고 자본을 일단 확보하고 확보된 자본은 축적되어 가며 세대를 넘나들고 대를 이어가면서 피를 타고 전해진다.
가상의 재화인 돈은 돌고 도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 방향성만큼은 한결같이 다음에 오는 화폐로서 철저하게 미래가치를 반영한다. 가상은 상상이므로 오지 않는 미래를 상상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자본은 과거에 머물러 있지 않고 현재에서 소비되며 미래를 반영한다. 돌고 도는 돈과 근본과 기본에 의해 창출되는 자본은 그 지향점만큼은 한결같이 미래를 가리킨다. 어쩌면 가상의 화폐, 자본이 상상하는 미래를 가리킨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리의 미래는 자본을 얼마나 축적했는 가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나 이 얼마나의 개념에서 많은 인간들은 자본주의 세상이 은연중에 가하는 협박성 속삭임에 굴복하여 두려움과 공포를 확대 재생산하면서 더더더 조금만 더를 인생의 목표로 정하고 자본의 다다익선을 쫓아가면서 한 생을 낭비하다가 결국에는 배가 터져 죽는 두꺼비 신세가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흘러가버린 과거의 결핍 때문에 현재를 갈아 넣고, 오지도 않는 상상의 미래에다가 자본의 성을 차곡차곡 쌓고 있는 세상 속의 인간으로서 살아야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근본과 기본대로 태어난 사람으로서 한 생을 멋지게 살기 위해서는 돌고 도는 돈의 속성, 즉 자본에 대한 이중구속의 함정에서 벗어나야 자연에서 태어난 사람으로서의 삶과 세상 안의 인간으로 살아가다 사라지는 한 생을 의미 있게 조화시키는 방법이 보이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제언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