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 박지원은 황혼의 초라한 미명微明에 대해 누구도 기록으로 남기지 못한 황혼의 존재에 대해 의미 심장한 한마디를 연암집에 남겼다고 한다.
연암집에 기록된 인순고식因循姑息, 구차미봉苟且彌縫이라는 말은 밖으로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이라는 서양의 여명黎明이 서서히 밝아오고 중화질서로 대표되는 팍스 시니카가 찬란하게 황혼의 미명微明을 태우며 절벽을 만난 듯이 서산으로 떨어질 무렵이었고, 연암 개인적으로는 실사구시의 실학자답게 나나 나라가 만든 존재의 방 속에서 사라져 가는 존재에 대하여 회피하지 않고 실제적 통찰을 통하여 정면으로 맞선 것으로 보인다.
인순고식因循姑息이란 낡은 습관이나 폐단을 버리지 못하고 눈앞의 편안함 만을 취한다는 뜻이며, 구차미봉苟且彌縫은 일이 잘못된 것을 임시변통으로 이리저리 구차하게 억지로 끼워 맞추는 미봉책을 대책이랍시고 고집한다는 의미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환갑 이후의 삶에 대해 기대 반 설렘 반으로 진갑을 맞이했다. 그러나 무자비한 시간의 흐름에 맡겨진 생로병사의 여정에서 나의 조그마한 정신승리는 그야말로 조족지혈鳥足之血의 한 점이요 족탈불급足脫不及이라고 하는 가련한 한 인간의 몸부림이라는 것을 처절하게 느꼈다.
마이크 타이슨의 명언처럼 "모두가 링 위에 오르기 전까지는 그럴싸한 계획을 가지고 오른다. 링 위에 올라서 묵직한 한 대를 맞기 전까지는"이라는 말처럼 지독하게도 알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이 공간의 숙명이고 인간의 운명이며 시간의 미래이다.
숙명과 운명이라는 어길 수 없는 명을 받고 살았던 나가 세상을 조금 살아보았다한들 미래는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갈지之 자로 시시각각 다가오는 스나이퍼처럼 존재라고 하는 개체의 생명줄을 단번에 저격할 수도 서서히 말려 죽일 수도 있음을 깨닫는 것만 해도 예측의 90%는 달성한 것이라는 역설적 명제 앞에 애써 초연한 척하여도 우리를 가두어 버리는 인생이라는 존재의 방에 들어서면 그대로 산산이 부서지거나 적나라하게 발가벗겨지는 양자택일의 선택 외에는 대안이 없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사람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뜨거운 본능과 차가운 이성이 늘 충돌한다. 이것은 마치 뜨거운 피와 차가운 물이 조화하는 것과 같고 인체가 수승화강水昇火降의 섭리로 돌아가는 것과 닮아 있다. 즉 인간은 내부적으로는 1밀리의 오차도 허용해서는 안 되는 섭리의 세계가 지배하는 몸을 타고 태어났으며, 그 몸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내기 위해서 손과 뇌가 공진화하면서 끊임없이 뇌정보를 갈고닦는 후성유전을 획득한 결과 눈부시게 발전된 현대문명을 이루어낸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그 후성유전학의 핵심원리가 대를 이어 영속하는 개별개체의 입장에서는 쓰이고 버려지는 한 생이라는 존재의 방 안에 갇히면서 명멸하는 가련한 존재에 불과하다는 무자비한 깨달음을 인생 말년에 가서야 비로소 절감하는 것이다.
천길 낭떠러지에서 아슬아슬하게 버텨내면서 찬란했던 젊은 날의 명철한 판단을 추억 삼아 지금은 노쇠해 버린 손과 뇌의 어눌한 협업을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며 눈앞의 편안함 만을 취하는 인순고식因循姑息과 이리저리 구차하게 억지로 끼워 맞추는 구차미봉苟且彌縫을 반복하고 있는 무력한 자신의 그림자를 무덤과 같은 존재의 방 안에서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결국은 무無로 돌아가고 덤으로 사는 임시변통과 같은 인생 말로난末路亂을 온몸으로 겪어내고 장수가 축복인지 저주인지도 모호한 순간이 오면 산에 있으나 방안에 있으나 진배없는 말년의 삶에 좌절하다가 그야말로 혼비백산魂飛魄散하면서 무덤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이 우리 모두의 성공한 한 생의 말로末路라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