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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 해 록 ] 영웅英雄의 몰락沒落

by 윤해

영웅본색英雄本色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1986년 개봉된 홍콩 르누아르 영화의 대표작이다. 주윤발 장국영을 일약 월드스타로 등극시킨 오우삼 감독의 영웅본색 시리즈물을 다 본 사람은 많지 않겠지만 영화제목과 함께 주윤발이 가지고 등장하는 소품, 쌍권총과 기관단총 그리고 꼬나 문 담배와 달러지폐를 태우는 퍼포먼스까지 강렬하고 다채로웠던 영화 포스터는 정말 영화 포스트의 영웅본색英雄本色을 보는 듯하였다.


강렬한 남성성을 바탕으로 매머드까지 사냥했던 수렵시대의 용감한 전사들이 오히려 모계 사회를 이루면서 여왕개미를 중심으로 한 병정개미의 역할 밖에 할 수 없었던 영자英雌의 전성시대를 지나오면서 1 만여 년 전 인류는 땅에 정착하고 농업혁명과 가축혁명을 일으키면서 화폐 경제가 지배하는 가상의 세상을 기어이 만들고야 말았다.


농업혁명으로 생산된 잉여농산물은 가상의 화폐로 차곡차곡 저장되었으며 대를 이어 상속함으로써 세상의 주도권은 실상의 수렵시대 모계사회에서 가상의 문명을 기반으로 하는 부계사회로 탈바꿈하는 인류사적으로 부정할 수 없는 획기적인 전환을 이루었고, 문명으로 밝힌 시대사적 전환은 필연적으로 세상을 글로 바꾸면서 문화의 힘을 키웠고 문화와 문화가 충돌하면서 문화 전쟁이라는 피할 수 없는 건곤일척의 전쟁을 치렀다.


그 문화 전쟁은 또다시 수렵시대 전사들의 용맹을 차용하면서 수렵시대의 주인공 영자英雌를 문명시대의 주인공 영웅英雄으로 탈바꿈시키는 박스갈이를 통해 문화전쟁 속의 영웅의 서사는 완성되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탄생한 문화전쟁 속의 영웅英雄은 수렵시대 모계 사회의 주인공인 암컷의 전유물이었던 꽃봉오리 암컷, 즉 영자英雌의 이미지를 차용하여 꽃봉오리 수컷이라는 새로운 의미의 영웅英雄으로 재탄생되면서 영웅英雄은 본색本色을 드러내는 것이다.


꽃봉오리 사내라는 뜻의 화랑花郞 관창을 앞세워 백제의 꽃봉오리 수컷, 영웅英雄 계백의 오천 결사대를 격파하고 삼국통일의 서전을 승리로 일군 황산벌 전투 이후 한반도는 영웅英雄의 시대에서 언더독 Underdog 신화를 기반으로 하는 민중의 시대로 그때 이미 변화한 것은 아니었을까 지레짐작해본다.


꽃은 피고 지고, 꽃봉오리는 꽃망울을 맺고난 다음에 꽃망울의 무게 때문에 꺾이고 떨어진다. 그리고 꽃처럼 화사하게 피어났던 암컷, 영자英雌의 전성시대를 지나왔고 꽃봉오리처럼 늠름했던 수컷, 영웅英雄들의 본색本色도 바닥을 드러내며 세상은 민중들의 원초적인 욕망으로 들끓고 있다. 그들은 애초에 영웅英雄의 대서사를 원한 것이 아니었는 지도 모른다.


핍박받는 무지렁이 민중들의 대서사를 가상에서 완성한 그들은 민중들 중에서 언더독의 신화를 만들어 내면서 가짜 영웅英雄을 내 세우고 그 영웅英雄의 탈을 쓴 간웅奸雄들에게 아낌없는 몰표를 몰아주면서 어쩌면 그들은 수렵시대 매머드를 사냥하여 공평한 분배를 약속 했던 모계사회의 할머니, 영자英雌의 전성시대를 그리워하는 본능과 만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 안에 잠재되어 있는 언더독이 꿈틀대는 세상 속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터져 나오는 영웅英雄들의 몰락을 지켜보면서 어지간해서는 놀랍지도 않지만 하도 험악한 악세를 만나다 보니 별 희한한 상상까지도 하면서 실소인지 조소인지 알 수도 없는 미소를 지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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