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워도 채운 것이 아니고 비워도 비운 것이 아니다. 끝없이 무언가를 채우려고 하는 세상과 끝없이 무언가를 비우려는 자연 사이에 놓인 인간의 행복과 불행을 좌우하는 것이 이 채움과 비움이 그려가는 희비쌍곡선이다.
우리가 사는 이곳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무엇이라 할 수 있을까? 천차만별, 다층세상, 오리무중 아니면 천자문 첫 글자인 천지현황이라 한마디 하고 끝내면 과연 마음이 편해질까?
스스로 그러한 자연이 고정 상수라고 한다면 그 자연 속을 살아가는 만물은 이동 변수라고 보면 비유가 될지 모르겠다. 이처럼 우리는 고정 상수 자연과 이동 변수와 같은 인간을 닮은 만물이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통해 있는 듯 없는 듯 변수의 감각체계로 인식하면 있고 인식하지 못하면 없는 수학과 과학의 가정 안에서 나를 파악하고 너를 알아나가며 세상을 이해하고 자연을 느끼며 우주까지도 확장하여 나는 누구이며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를 끊임없이 사유하고 찾아가는 별스러운 별아이 같은 존재는 아닐까?
부모로부터 몸 하나 입고 태어난 우리가 세상을 살아내기 위해 갖가지 유혹과 협박 속에서 생로병사를 겪고 피나는 분투노력을 하다 보면 내가 왜 여기 있으며 무엇하러 그렇게 악착齷齪 스럽게 살았어야 했지라고 하는 현타가 오기 마련이다.
이 지점에서 무너지면 끝장이고 바로 나락으로 떨어진다는 두려움을 파는 세상의 속삭임 때문에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면서 갈피를 못 잡고 헤매는 존재가 그래도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부하는 우리 인간의 한 생이라는 자각 없이는 세상에 중독된 우리의 삶을 반전시킬 방법은 그야말로 오리무중일 뿐이다.
그저 느끼고 그냥 누리며 마냥 즐기면 되는 자유인의 삶은 자연 속의 사람이 세상 안의 인간이 되는 순간 사이를 느껴야 하고 관계를 생각해야 하며 그로 인해 야기되는 결과까지도 책임져야 하는 처지에 놓이는 것이다.
만물이 ‘저절로 그러한 것(自然)’에서 태어나서 저마다 가진 것을 뽐내며 기승전결의 한 사이클을 돌리며 자연리듬에 따라 살아가고 사라지지만 유독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부하는 인간 만이 문명을 통해 세상이라는 일종의 가상공간을 만들면서 법을 통해 밥을 구하고 밥을 미끼로 공포와 두려움을 심어주면서 자유함 보다는 의지함을 먼저 배우고 내 안에 있는 것보다는 내 밖에 있는 것에 더 관심을 가지면서 사이와 관계 속에서 희로애락 오욕칠정을 느끼면서 점점 더 나를 잊고 너를 의식하는 본말전도의 세상을 만들고야 말았다. 이 뒤집힌 세상에서 중심을 잡고 살기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할 정도로 좁은 길이며 아무도 갈려고 엄두도 못 내는 두려운 길이 되고 말았다.
이처럼 세상에 취해 살면 반듯하게 무탈하고 무고하면 그만이라는 매너리즘에 금방 잠식당한다. 내 밖에 있는 세상도 소중하지만 내 안에 있는 자연을 닮은 소우주야 말로 그 무엇보다도 귀중한 존재이다.
쓰러지고 넘어지더라도 한 번쯤 땅을 딛고 다시 일어나 하늘을 보면 세상 속에서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창공이 공즉시색 색즉시공의 자연으로 이루어졌음을 어렴풋이 깨닫는다. 이 단순한 깨달음을 노자도덕경에서는 “사람의 법은 땅이요, 땅의 법은 하늘이요, 하늘의 법은 도이니, 그 도의 법은 스스로 그러함이다(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라고 하였고, 공자는 중용에서 “하늘이 명한 것을 본성이라 하고, 본성을 따르는 것을 도라 하며, 도를 닦는 것을 가르침이라 한다(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라고 굳이 어렵게 말한 것은 아니었을까? 지레짐작 한 번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