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우리 국군의 생명과도 같은 개인화기 K2 소총의 유효 사거리는 600미터이다. 580미터의 거리에서 적과 대치 한다는 의미는 언제라도 소총 한 발에 의해서 목숨이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극심한 공포 속에 병사들이 놓여 있다는 상황을 그대로 대변한다.
1980년 5.17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면서 이어 전국 대학 휴교령 속에서 발생한 광주의 비극을 딛고 혼란했던 정국을 철권통치로 잠재웠던 서슬 퍼런 신군부 집권으로 시작된 1980년대의 남북관계는 1983년 한글날에 북한이 저지른 버마 아웅산 테러를 시작으로 88 서울 올림픽을 저지하기 위해 1987년 11월 29일 중동 근로자들을 태운 대한항공 858기 공중폭파 테러까지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을 걷는 남북대치 상황은 언제 국지전이 터져도 이상할 것이 없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그런 팽팽한 긴장 속에서 강원도 고성 최전방 보병 사단으로 입대한 나는 학창 시절 신군부 독재가 휘두르는 억압과 탄압으로 힘들었던 기억이 소환되면서 군대라고 하는 조직을 막연히 경멸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자신의 사익을 앞세워 법질서를 파괴하고 국민들의 정당한 주권을 제한하면서 국가를 손아귀에 넣은 자들의 통제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도 젊은 날 자유로 충만했던 나로서는 지옥문에 들어서는 느낌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지만 병역의 의무를 마치기 위해 국가의 부름에 응답했다.
국가의 부름에 응답하여 병상의 아버지를 뒤로하고 입대한 나를 기다리고 있던 가혹한 현실은 국민개병제 하의 국가권력과 국민의 관계를 다시금 곱씹게 되었고 그 당시 대한민국 군대의 허실을 몸으로 부대끼며 겪고 보면서 내 인생의 가치관 마저 참 많이도 바꾸어 놓았다.
최전방 사단에서 훈련받으면서 느낀 첫인상은 이렇게 노력하는 집단이 국가를 지배할 수밖에 없다는 막연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열패감劣敗感이었다. 그 당시 강원도 고성의 최전방 보병 사단의 장병들은 서부전선에 비해 말도 안 되는 열악한 시설과 보급을 받으면서도 계급의 고하를 불문하고 대부분 맡은 바 임무를 완수하고자 밤잠을 설쳤고 동시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어려운 처지로 내몰리고 있었음에도 나름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모습을 느낄 수 있었다.
병상의 아버지를 뒤로 하고 최전방으로 간 내가 입대하자마자 보름 만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부고를 그 당시 군대의 허술한 관보 누락으로 받지 못하고 그로부터 20일이 지난 후에 유명을 달리하신 아버지의 부음을 짤막하게 전해 들은 당일에도 군장을 챙기고 훈련에 나서면서 국가의 절대 폭력하에 놓인 개인의 희생이 어떠한 의미인가를 절절히 사무치게 느꼈다.
훈련을 마치고 배치된 수복지구 강원도 고성의 최전방 사단은 원산만에서 내려오는 명사십리 백사장을 타고 해금강의 절경에서부터 시작하여 속초까지 내달리는 눈부신 동해를 끼고 왼편으로는 설악산 울산바위를 품고 있는 녹사평 구릉 지대를 타고 넘으면서 건봉산을 거쳐 금강산 바로 앞에서 허리가 잘린 분단이라는 통한의 철조망과 만나면서 배치된 GOP, GP, 그리고 해안초소들은 3년 간 내가 누비고 다녀야 할 병역의 무대였다.
이처럼 155마일 휴전선은 군사분계선 MDL을 가운데에 두고 양쪽 2킬로까지 남방한계선과 북방한계선을 긋고 비무장지대 DMZ를 설정하기로 합의하였으며, 임의로 더 남쪽에 그은 민통선(민간인출입통제선)이 있다. 따라서 최전방 155마일 휴전선은 군사분계선 MDL과 남방한계선 그리고 민통선(민간인출입통제선)이라는 3선으로 구분되어 있다.
남방 한계선 철책 요지마다 설치된 GOP와 통문, 통문을 통해 들어간 비무장 지대 DMZ에는 비무장 지대 DMZ라는 말이 무색하게 남북 양측이 구축한 요새와 같은 성을 방불케 하는 GP가 자리 잡고 있고 GP에 들어간다는 것은 일단 유사시 전쟁이 발발하면 자신의 목숨을 국가를 위해 초개와 같이 버려야 한다는 폭압적인 국가의 명령이며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젊은이들이 총을 들고 한시도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고 지켜야 하는 곳이 155마일 휴전선임을 머리로는 알지만 몸으로 실감하는 우리 국민들은 드물다.
한국전쟁 당시 휴전 직전까지도 한 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고지전을 치른 서부전선의 백마고지전투, 중부전선의 단장능선 전투 그리고 동부전선 금강산 자락 월비산이 어른거리는 351 고지전을 6.25 전쟁의 3대 고지전이라고 부른다.
이루 헤아릴 수도 없는 병사들의 피와 살로 뺏고 뺏긴 전략적 요충지 고지를 군대도 갔다 오지 않은 국가의 위정자들은 너무나 안이하게 정치적 합의를 통해 뒤로 물렸다. 1953년 군사 정전협정이 체결된 후 남측 지역에 지은 첫 감시초소인 강원도 고성군 수동면 덕산리 산 1번지 동해안 감시초소(GP)는 1953년 군사정전협정 체결 직후, 남측 지역에 설치된 최초 감시초소이다. 2018년 4·27 판문점 선언 이행을 위한 '9·19 군사분야 합의서'에 따라 감시초소 시범철거 과정에서 존치가 결정되었고, 문화재청은 이 GP의 역사적 가치와 상징성을 인정해 문화재 등록을 적극 검토 중이며, 공식 명칭은 ‘고성 최동북단 감시초소(GP)’로 확정되었다는 기사가 있었고 실제로 2019년 6월 5일 국가문화유산으로 등록을 마쳤다. 이후 남북관계 경색으로 북한은 동해안 감시초소 GP로부터 불과 580미터 거리에 북한군 GP를 복구하였다. 우리가 관광상품으로 고성 최동북단 감시초소(GP)를 노래할 때 북한은 전략적 자산을 북한군 GP에 배치하면서 소총으로도 우리 측을 위협할 수 있는 지근거리까지 다가왔다.
미국의 16대 대통령 에이브러험 링컨은 남북전쟁을 통해 노예해방을 완성하여 오늘날 아메리카 합중국을 패권국가의 위치로 올리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위대한 대통령으로 기억되는 지도자였다. 남북전쟁이 한창 진행되고, 치열했던 게티즈버그 전투가 끝난 지 4개월 후 1863년 11월 19일 열린 국립묘지 봉헌식에서 행한 링컨의 3분짜리 짧은 연설, that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이란 링컨의 연설은 시대를 관통하여 국가의 존재이유를 웅변했다. 그러한 링컨조차도 국가의 실체를 이렇게 정의했다. " 국가는 평시에는 국민의 재산을 약탈하고 전시에는 국민의 생명을 바칠 것을 요구한다."
국민의 재산과 생명을 깃털처럼 가볍게 여기는 위정자들이 판을 치면 국가는 깃털처럼 가볍게 부서진다. 세계 패권질서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각자도생의 제국주의가 열리려고 하는 이때 과연 이 땅의 위정자들은 580미터와 600미터의 의미를 과연 알고나 있을까? 아니면 오십보소백보五十步笑百步 쯤으로 깃털처럼 여기며 웃고 있는 것은 아닌지 폭풍전야의 흔들리는 찻잔의 미동을 느끼면서 국민의 희생 만을 요구하기에는 국가가 너무 멀리 와있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