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 소녀의 인생에 질곡이 된 한국의 굴곡진 역사
첫사랑은 절대 죽지 않습니다
(First love never dies — 영국 속담).
Disclaimer: 이 이야기는 오래전 한국 언론에 소개되었지만, 혹시 몰라 사생활 보호를 위해 실명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AI에 물어보니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말은 놀랍게도 한국에서 만들어진 ‘도시 전설’이라고 한다. 누가 언제 이 말을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덕수궁 돌담길을 연인과 걸으면 헤어진다”거나 “선풍기를 틀고 자면 죽는다”는 근거 미약의 속설보다는 훨씬 더 진실에 가까워 보인다. (아마 나도 첫사랑이 실패했기 때문에 더 공감하는지도)
오늘 소개할 한 핀란드 여인의 첫사랑도 결론부터 말하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그 이유는 개인적인 사정은 아니었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가문의 벽에 막혔다면, 이들 사이를 가로막은 것은 국가 권력이라는 더 높고 거대한 장벽이었다. 그 국가는 한국이었고, 그녀의 첫사랑은 한국 청년이었다.
1967년, 두 사람은 덴마크 헬싱외르(Helsingør)의 작은 학교에서 처음 만났다. 김 씨가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후에도 두 사람은 편지를 주고받으며 애틋한 마음을 이어갔다. 그러다 1969년 5월, 돌연 김 씨로부터 답장이 끊겼다. 그녀는 계속 편지를 보냈지만 답장은 끝내 오지 않았다.
김 씨의 침묵은 자의가 아니었다. 그는 1969년 ‘유럽 유학생 간첩단 조작 사건’에 휘말려 5년 형을 선고받고 수감 중이었다. 덴마크 체류 중 동베를린을 방문한 일이 빌미가 되어 간첩으로 몰린 것이다. 1973년 석방된 뒤에도 ‘빨갱이’라는 낙인 속에 풍비박산 난 집안을 먼저 일으켜 세워야 했다. 이후 가정을 꾸리고 자녀를 키우며, 유학 시절 익힌 영어와 옥중에서 배운 일본어를 바탕으로 세계적인 도금 기술 전문기업을 일궈냈다.
그는 2015년 12월, 대법원의 무죄 확정으로 간첩 누명을 완전히 벗었다. 그리고 그즈음 극적으로 에델과 다시 연락이 닿았다. 헤어진 지 정확히 50년이 되는 2017년, 두 사람은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재회했다.
“입국 수속을 마치고 나오니 먼 거리에서 누군가 번쩍 두 팔을 치켜들고 환호하며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두 손으로 감싸 안은 노쇠한 얼굴에서 50년 세월의 무게가 슬프게 느껴졌다.”— 김 씨의 페이스북 포스트 중
내가 ‘에델’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2015년이다. 핀란드를 방문한 김서령 작가님이 나를 만나자마자 다짜고짜 부탁했다. “에델이라는 핀란드 여성을 꼭 찾아주세요!”
김 작가는 2008년 한 월간지에 김 씨에 대한 인물기사를 쓰며, 그가 수십 년간 가슴에 묻어두었던 첫사랑 이야기를 ‘오프 더 레코드’로 들었다고 했다. 이후 핀란드에 간다고 하자, 김 씨가 첫사랑을 찾아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그 부탁이 이제는 내 앞에 떨어졌다. 그녀의 성과 이름을 한글로만 전달받아서 핀란드식 표기를 추정해 페이스북을 검색했다. 다행히 같은 이름의 계정이 딱 하나 있었다. 거주지는 덴마크였고 프로필 사진도 볼 수 있었다. 메시지를 보냈지만 답은 오지 않았다. 실례를 무릅쓰고 다시 메시지를 보냈지만, 그녀는 묵묵부답이었다.
그 후 2년 반이 지난 후에 김 작가님으로부터 놀라운 메시지가 왔다.
“김 선생님이 드디어 에델을 덴마크에서 만나기로 했어요!”
김 선생님이 내가 알려드린 계정으로 직접 메시지를 보냈고, 에델이 1년의 침묵 끝에 마침내 답장을 보내온 것이다.
“나는 오랫동안 답장하기를 망설였습니다. 내 인생이 부끄러웠기 때문입니다… 아이 둘도 혼자 키웠습니다. 외로움만이 내 삶의 지속적인 벗입니다.”
“당신을 수천 번도 더 꿈꾸었습니다. 나 김XX예요.”
김 선생님이 덴마크로 갈 것을 결심하자, 에델은 기쁨보다 미안함을 먼저 얘기했다.
“김(Kim)에게, 미안해요. 머물 곳을 제공해 드리지 못할 것 같아요. 제가 집을 소유하고 있지 못하거든요.”
그녀의 녹녹지 않은 현재 상황을 메시지를 통해 엿볼 수 있다.
2017년 9월, 두 사람은 코펜하겐에서 재회를 약속했다. 처음에는 나도 김 작가님과 함께 동행하기로 했지만 계획이 바뀌며 덴마크행을 취소해야 했다. 그런데 싼 표를 샀던 탓에 환불이 되지 않아 결국 혼자 여행을 떠났다. 그런데 코펜하겐에 도착하자마자 예상치 못한 메시지가 김 선생님으로부터 왔다.
“지금 숙소로 와주실 수 있으신가요?”
숙소에 들어서자, 그가 묘사했던 대로 ‘지중해 바다처럼 파란 눈빛을 가진 소녀’가 앉아 있었다. 혹시 몰라 핀란드에서 챙겨간 초콜릿과 호밀빵 모양의 냄비받침을 건네자, 에델은 그것을 진짜 빵처럼 먹는 시늉을 했다. 그녀의 장난기 덕분에 어색함은 금방 사라졌다.
“혹시 결혼했나요? 아님 여자친구가 생겼나요?”
(1970년 4월 에델이 보낸 편지 중)
1969년부터 이어진 김 씨의 오랜 옥중 생활을 알 길 없던 에델은 혼자서 온갖 상상을 하며 편지를 보냈다. 영어를 몰랐던 김 씨의 가족들은 그 편지들을 보관만 하다 석방 후에야 전달했다고 한다. 에델이 ‘삶의 벗’이라고 부른 외로움은 김 씨의 미스터리한 실종에서 시작된 것이었을까.
50년 동안 어긋나기만 했던 여정이 비현실적이게 느껴질 정도로, 두 사람은 지금 소파에 나란히 앉아 있다. 그런데 두 사람의 표정은 미묘하게 차이가 난다. 김 선생님은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는데, 에델은 세월의 체로 걸러진 듯한 잔잔한 미소만 짓고 있다. 다행히 모진 인생이 그녀의 온화한 미소는 뺏아가지 않았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그녀는 적어도 내 눈에는 인생의 실패자로 보이지 않았다. 평생 자신을 그리워한 첫사랑을 가진 사람이라는 점에서 부럽기까지 했다. 물론 두 사람은 ‘사랑’ 대신 ‘정치적으로 옳은’ ‘우정’ 혹은 '친구'라는 단어만을 사용했지만.
그날 밤, 두 사람은 1967년 마지막 포옹을 나눴던 코펜하겐 중앙역을 다시 찾았다. 에델의 말에 따르면, 그날 청년 김 씨는 남의눈도 의식하지 않고 목놓아 울었다고 한다. 그때는 이별이 이렇게 길어질 줄 몰랐지만, 단 몇 달의 이별도 그토록 서러웠던 것이다. 이번에는 눈물 대신, 강렬한 직선의 눈빛이 서로를 오랫동안 놓아주지 않았다. 다행히 내일 또 만날 수 있다.
다음 날 아침, 두 사람은 기차를 타고 한 시간 남짓 달려 헬싱외르의 옛 학교를 찾았다. 헬싱외르는 셰익스피어의 비극 『햄릿』의 배경인 크론보르 성(Kronborg Castle)이 있는 고풍스러운 도시다.
학교 직원은 “제가 태어난 해에 졸업하셨네요”라며 너스레를 떨며 친절하게 안내해 주었다. 두 사람은 2인용 타임머신에서 막 내린 듯, 오래전 그날처럼 앞마당에서 그네를 타고 교정을 거닐고 떠 거닐었다.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김 선생님은 이 평화로운 교정과는 180도 다른 한국의 암울한 옥살이를 당시 어떻게 견딜 수 있었을까.
“감옥 생활이 힘들 때마다 이곳에서의 찬란했던 시간을 떠올리며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추억은 어두울 때 한 줄기 빛이 되어준다.
마지막 날, 에델은 극구 말렸음에도 모두에게 대접하고 싶다며 유명 빵집에서 페이스트리와 커피를 잔뜩 사 왔다. 자신에게는 아시아 계통인 핀란드 원주민 ‘사미족’의 피가 흐른다며 웃는 그녀의 모습은 정 많고 잘 챙겨주는 우리네 어머니와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때 갑자기 ‘50송이 장미꽃’ 이벤트가 펼쳐졌다. 50년의 세월을 상징하는 꽃다발이 에델에게 주어졌다. 그녀는 이번에는 잔잔한 미소대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인처럼 처음으로 환하게 웃었다.
““꽃다발을 건네받고 상상하지 못했던 선물에 놀라고 행복해하는 모습이라니... 순탄치 못하고 외롭게 살아온 에델에게 짧으나마 조그마한 위로와 행복을 맛보게 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다행이겠는가!”— 김 씨의 페이스북 포스트 중
평소 동양 종교에 관심이 많다는 에델은 ‘카르마’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이번 생에는 짧은 만남과 긴 그리움이었지만, 다음 생에는 긴 만남을 믿나요?”
김 선생님은 의외로 쉽게 답하지 못한다. 처음으로 50년 전의 청년이 아닌, 75세 노년의 삶의 무게가 진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김 선생님은 50년 동안 간직해 온 편지 복사본과 이번 여행에서 함께 찍은 사진을 에델에게 건넸다. 다시 역 앞이다. 에델이 50송이 장미를 안은 채 손을 흔든다.
“살아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50년 후면 2067년이네.”
서로 웃지만, 행간엔 숙연함이 깃든다.
“내 청춘의 한때, 그리고 오랫동안 그리워했던 옛 친구에게 세상의 모든 축복이 함께하기를.”— 김 씨의 페이스북 포스트 중
그녀는 다시 긴 그리움의 시간 속으로 한 걸음씩 걸어갔다. 무거운 꽃다발을 들고도 발걸음이 처음보다 가벼워 보였다. 마지막 날 그녀의 입에서 나왔던 힐링(Healing)이란 단어와 연관이 있으리라.
P.S. 에델, 앞으로는 절대로 당신 자신이나 당신이 겪었던 운명을 부끄러워하지 마세요. 그리고 삶이 당신을 더 이상 속이지 않기를 바랍니다. 부드러운 미소를 절대 잃지 마세요. 당신을 항상 응원하고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