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에서 맞는 첫눈?
개나 줘버려!

핀란드는 어떻게 내 첫 눈의 로망을 앗아갔나

by 어나미


"까마득하게 잊어버렸던 이름 하나가 시린 허공을 건너와 메마른 내 손등을 적신다."

(김용택의 시 『첫눈』 중)


"가을은 가고, 겨울의 기운이 왔네. 하얗고 차가운 베일. 이것은 장난도 아니고, 꿈도 아니라네. 그저 순수하고도 묵직한 눈일 뿐. 이제는 마음을 단단히 다잡아야 할 때, 그 누구도 이 추위를 피할 순 없으니."

(핀란드 전래동요 『Ensi lumi 첫눈』)



‘첫눈’은 언제나 특별했다. 김용택 시인의 「첫눈」, 김연수 작가의 소설 『첫사랑』 속의 첫눈처럼, 첫눈은 우리에게 첫사랑을 일깨우는 신호였다. 영화 『건축학개론』에 나오는 주인공들처럼 “첫눈 오는 날 만나자”고 약속했던 연인들은 또 얼마나 많았을까. 우리는 첫눈을 기다리고, 첫눈을 약속하고, 첫눈을 기억한다.


핀란드에서도 첫눈에 대한 추억을 처음 몇 년간은 잘 쌓아 갔던 것 같다. 정착한 첫해, 기차 여행을 하며 첫눈 내린 망망 설원 속에서 ‘낯선 고향’이란 이상한 단어를 떠올렸던 강렬한 기억. 첫째 미꼬가 아직 아기였을 때, 첫눈이 오던 날 갑자기 유리창에 얼굴을 바짝 들이밀더니,


“눈아, 눈아!”

하며 눈이 살아 움직이는 줄 알고 손 흔들며 외치던 모습 등 말이다.


harri-p-XSN5jj8PyBU-unsplash.jpg 얼어붙은 호수에 눈이 내리면 photo: Harri P on Unsplash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첫눈에 대한 내 기억 혹은 추억이 뚝 끊겨버렸다. 아마도 핀란드에 적응이 완료된 때부터인 듯하다. 핀란드 겨울은 한국보다 훨씬 춥고, 해가 나지 않아 어둠의 세계다. 겨울에 태어나 한국에서는 한때 겨울을 사계절 중 가장 사랑한 소녀였지만, 핀란드에서 내가 한국에서처럼 겨울을 사랑한다고 하면 ’이상한 사람’이란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내가 사는 핀란드 남부는 10월 하순, 북부 라플란드는 9월이면 이미 눈 소식이 들려온다. 보통 마지막 눈은 다음 해 5월에 내리니, 눈을 기준으로 겨울 기간을 정하면 겨울이 1년의 절반 이상인 셈이다. 지금은 지구 온난화로 겨울 평균 기온이 많이 올라갔지만, 불과 20년 전만 해도 남부에서조차 영하 30도까지 떨어지는 극한 추위를 견뎌내야 했다.


vatroslav-bank-1ZjUE655rVw-unsplash.jpg 눈보라가 치는 헬싱키 시내 photo: Vatroslav Bank on Unsplash


이런 비인간적인 겨울을 매년 견뎌야 하는 사람들에게 첫눈이 낭만으로 다가오기란 쉽지 않다. 이들에게 첫눈은 이런 ‘긴 전투의 서막’을 알리는 알람벨과 같다. 핀란드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한 한국어 교사가 인터넷에 올린 흥미로운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첫눈에 관한 아름다운 한국 시구를 수업 시간에 소개했는데, 학생들의 반응이 의외로 싸늘해서 너무 놀랐다고 한다. 그 이유를 한 학생의 설명으로 알 수 있었다고.


“핀란드에서는 첫눈이 내리면… 드디어 올 게 왔구나, 하고 오히려 비장해져요.”


핀란드 사람들로부터 날씨와 관련된 몽글몽글한 낭만적 반응을 이끌어내려면 눈이 아닌 태양을 한번 찬미해 보자. 핀란드에서는 여름을 제외하고 햇빛을 볼 수 있는 날이 많지 않다. 햇빛이 빼꼼 조금만 비쳐도 사람들은 밖으로 나선다. 나도 해가 나는 날에는 주변 호숫가를 산책하곤 한다. 태양이 호숫가 전체를 다 비쳐주면 좋으련만, 스포트라이트처럼 좁게 한 곳만 비쳐주는 경우가 많다. 그 자리조차 누군가가 먼저 점하고 있을 확률이 높아 내 차지가 되기는 쉽지 않다. 그곳에서 움직이지 않고 오랫동안 태양광을 쬐고 있는 핀란드 사람들을 보면 태양 에너지를 충전하는 인간축전기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쉽게 그 자리를 내어줄 것 같지 않으면 슬쩍 줄을 서 볼 때도 있다. 핀란드에서 줄은 맛집이나 명품 가게 앞에서만 서는 것이 아니다.


햇볕이 풍부한 한국에서는 해가 날수록 그늘을 찾지만, 핀란드에서는 정반대다. 아마도 핀란드에서 양산 장사를 한다면 에스키모에게 냉장고를 파는 것보다 더 어려울지 모른다.


첫눈에 설레는 한국인과 대신 긴 한숨을 쉬는 핀란드인.

해가 나면 그늘을 찾는 한국인과 해 쪽으로 방향을 돌리는 해바라기 핀란드인.

같은 날씨를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두나라의 극명한 ’온도 차’가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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