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 핀란드]
따뜻한 맥주와 차가운 빵

핀란드의 미니멀한 선물문화

by 어나미


“선물은 신도 설득시킨다.” 에우리피데스의 『메데이아』중


핀란드에서 맞은 첫 크리스마스였다. 결혼 후 처음 맞는 명절이었기에 시댁 식구들에게 줄 선물을 고르는 데 온 신경을 쏟았던 것 같다. 시댁 식구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 좀 과한 선물들을 준비했었다. 하지만 그들의 반응은 전혀 예상 밖이었다. 내가 그들의 얼굴에서 읽은 것은 기쁨이 아닌 당혹감이었다. 그들이 나에게 준 크리스마스 선물을 확인하고 나서야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약속이라도 한 듯 모두 달랑 초콜릿 한 통이 전부였다. 선물을 하향 평준화로 맞춰 부담을 없애는 것, 그것이 핀란드에서 배운 첫 번째 선물과 관련된 ’매너’였다.


값비싼 선물은 신은 설득시킬지 몰라도 핀란드 사람들은 설득하기 어려울 수 있다. 핀란드 사람들은 직계 가족이 아니면 크리스마스나 생일에도 값비싼 선물을 주고받지 않는다. 국가마다 선물을 대하는 관점은 조금씩 다르다. 핀란드와 다르게 한국이나 일본처럼 선물이 관계의 ‘디폴트(기본값)’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나라도 있다. 일본은 특히 ’오미야게(お土産)’ (주: 자리를 비웠다는 이유만으로 주변인에게 꼭 챙겨주어야 선물)로 불리는 의무적인 선물 문화까지 있을 정도로 선물이 사회적 관계에서 무척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선물의 기원 자체도 의무감과 생존 전략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고대 시대, 소금을 둘러싼 갈등을 막기 위해 물물교환식 선물을 서로 주고받기 시작했다. 주변 약소국이 강대국에 바치던 조공도 생존을 위해 선물을 바치던 행위였다. 핀란드의 선물 문화가 상대적으로 덜 발달한 이유는, 유럽의 변방에 있었기에 이런 전략적 선물 문화에 노출이 덜 되었던 것이 아니었나 조심스럽게 추측해 본다.


분명 핀란드의 간결한 선물 문화가 가진 장점도 있다. 한국의 김영란법이 식사 5만 원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핀란드 공무원의 선물 상한선은 ‘따뜻한 맥주와 찬 빵(핀어: Lämmin olut ja kylmä sämpylä)’이다. 본래 맥주는 차고 빵은 따뜻해야 맛이 난다. 그런 이유로 ‘찬 맥주와 따뜻한 빵’은 핀란드에서는 정(情)을 넘는 뇌물이 된다. 실제로 핀란드에서는 고작 22.90유로(한화 약 3만 원) 짜리 보드카 한 병을 선물 받은 것이 뇌물로 인정되어 유죄 판결을 받은 사례까지 있다. 공무원에게 이런 결벽증적인 선물의 기준을 적용하고 있는 핀란드는 국제투명성기구(Transparency International)가 매년 발표하는 부패인식지수(CPI)에서 늘 세계 1~3위를 차지하는 세계에서 가장 청렴한 국가가 되었다.


핀란드에도 외부인이 보기에는 박(薄)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나름의 진심 어린 선물 문화는 존재한다. 세 아이를 키우며 참석했던 여러 번의 학교 종업식 혹은 졸업식에서 부모들이 선생님께 건네는 가장 흔한 선물은 놀랍게도 꽃다발 아닌 달랑 ‘장미 한 송이’였다. 몇 년 전 미스 핀란드는 인터뷰에서 가장 받고 싶은 선물로 값비싼 보석이 아닌 ‘손으로 짠 양말’을 꼽아 세계인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핀란드 사람들은 할머니, 혹은 엄마가 매년 크리스마스 선물로 떠주시는 털양말을 다른 어떤 선물보다 소중히 여긴다.


털양말.jpg photo: Laura Ohlman on Unsplash


영국 기업윤리연구소는 선물과 뇌물의 차이를 이렇게 구분했다.


- 받고 나서 잠이 잘 오는지

- 외부에 공개되어도 떳떳한지

- 자리가 바뀌어도 받을 수 있는지


이 기준으로 구분해 보면 핀란드 공무원이 받을 수 있는 '따뜻한 맥주와 차가운 빵', 그리고 핀란드 사람들이 가장 흔히 나누는 털양말과 장미 한 송이는 이 세 관문을 모두 거뜬히 통과하는 뇌물 아닌 완벽한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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