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황금종이 2가 보고 싶어 중고 거래한 여러 권의 소설책 상자가 도착했다. 포장을 뜯는 순간, 깜짝 놀랐다. 포장부터 뽁뽁이로 깨끗이 쌓여 있는 모습이 서점에서 지금 막 나온 듯한 따끈따끈한 새 책 같았다. 접힌 흔적이나 흠집 하나 없는 중고 책이라곤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깨끗했다.
사진을 찍으려다 황금종이 1권을 떨어뜨렸다. 표지가 약간 울었다. 소중히 여기는 내 모습을 보면서 새삼 낯설었다. 새 책도 아닌 중고 책을 여기저기 살피면서 딸이 생각났다.
딸이 초등학교 때부터 중학교 때까지 인터넷 소설책을 사 모았다. 그렇지 않아도 남편 책을 처리하느라 힘들었는데 이젠 딸 차례였다. 딸은 책이 오면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자세히 살펴보고 구김이나 잘못된 곳이 있으면 바로 반품했다. 그녀에게 책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소중한 보물이었다.
나는 그런 딸에게 한마디씩 했다.
“딸 같은 손님만 있으면 서점 장사하겠니? 흠집 좀 났다고 교환하고. 구겨졌다고 반품하고. 택배비가 더 나오겠다.”라고 핀잔을 주어도 딸은 신경 쓰지 않고 교환이나 반품했다.
기회만 되면 딸은 나에게
“엄마! 여기 있는 책 중에 내가 추천해 준 책 한 권만 읽어봐. 그러면 엄마도 새로운 세상의 즐거움에 빠질 거야!”라며 나에게 달콤한 말로 꼬드겼다. 그 당시 나는 첫 유방암 수술 후, 몸이 회복되면 할 일을 찾고 있었다. 또한 나의 욕심으로 사기당하고 머리가 복잡했을 때였다.
딸의 어떠한 달콤한 말에도 넘어가지 않았다.
“이쁘나! 엄마가 지금 책을 읽겠니? 엄마가 그 작은 글씨를 읽으면 머리에 들어오겠니? 엄마 한글 못 읽어. 매번 너희에게 읽어달라고 하잖아. 오죽하면 아들이 어렸을 때, 엄마는 한글 모르냐며, 초등학교도 안 나왔냐고 했겠니?”라며 거절했다.
딸은 엄마가 소설책에 빠지면, 자신이 원하는 책을 모두 살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엄마는 어디에 꽂히면 돈 생각 안하고 시리즈로 사들인다는 걸 알고 있었다. 우리 집에 쓸데없는 물건이 그래서 많다.
딸은 살 책 목록을 100만 원가량 저장해 두었다고 했다. “책을 살 때마다 돈을 줄이겠다.”라는 등 웃으면서 구박 아닌 구박했던 기억이 난다.
딸은 책을 사면 접힌 선도 생기지 않게 소중히 보았다. 한 번은 동생이 빌려 보다가 읽던 책을 뒤집어 놓고 볼일 보러 간 걸 딸이 보았다. 딸이 화를 내면서 다시는 책을 보지 말라고 했다.
놀란 아들은 아무 말 못 하고 울먹울먹했다.
“딸! 왜 그래? 책을 보다 뒤집을 수도 있고 접을 수도 있지?”라며 과잉 반응 보이지 말라는 듯이 말하자,
“내 돈 주고 산 거야. 나중에 다시 팔건 데 구김이 가면 제값을 못 받아. 그러면 너도 네 돈으로 사서 봐.”라며 단호하게 말했다.
“엄마에게 보라며? 엄마도 접어서 볼 텐데.”
“엄마는 보면 다른 거 사줄 거고. 엄마하곤 다르지.”라며 논쟁한 기억이 난다.
고등학교에 올라온 딸은 코로나로 학교를 거의 가지 않자, 사고 싶은 게 많았던 것 같았다. 나도 규칙적으로 용돈을 주는 성격은 아니었다. 필요하다면 주고 ‘명절 때 받은 돈이 있으면 알아서 쓰겠지? 없으면 달라고 하겠지?’라고 생각했기에 용돈 개념이 없었다.
어느 순간 아이들에게 용돈 준 기억이 오래된 것 같아 물었다.
“아들은 돈 쓸 일이 없으니 상관없지만, 딸은 무슨 돈으로 이렇게 물건들을 계속 사들이니? 아빠가 줄 일은 없고?”라며 물었다. 그 당시 남편은 경제활동을 하지 않았다.
딸은 자랑스럽게 자기 방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책장이 여기저기 빈 곳이 많았다. 깜짝 놀란 나는,
“이 많은 책이 다 어디 갔니?”라며 물었다. 딸은 웃으면서
“그거 다 팔았지! 내가 돈이 어딨어?”라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책을 팔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나는,
“책을 어디다 팔아?”
“당근이나 중고 서적. 이런 책들만 파는 곳 있어.”라며 흐뭇해서 말했다.
“그러면 얼마나 받아? 손해 많이 보지 않아? 아들이나 보게 놔두지?”라고 말하자.
“엄마! 내 돈 주고 산 거야. 어떤 책은 산 가격에 2배도 받고 어떤 건 70% 정도 받아.”
“두 배를 받아? 중고 책을?”
“한정판을 샀잖아. 내가 그때 그거 사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3배 이상 받은 것도 있어.”라며 말하는 딸이 너무 기특했다.
“엄마! 주식이나 코인 투자보다 낫다. 딸이 엄마보다 현명하네.”라며 칭찬해 준 기억이 난다.
딸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책을 사랑했고, 그 사랑은 그녀를 경제적 감각으로 이끌었다. 한정판 책을 사 모으며, 나중에 되팔아 이익을 얻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딸 방에 가득 있던 소설책들은 다른 주인을 찾아 떠나갔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말한 100만 원 치 책도 사줄걸. 얼마 되지도 않는데. 그렇게 사고 싶어 했는데. 미안했다. 중2부터 공부는 손에서 놓고 게임과 소설책만 읽었다. 솔직히 엄마로선 서운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말리지 않았다. 누구나 사춘기는 한 번씩 온다고 생각했기에.
중고 거래할 때, 가격 협상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꼭 받고 싶은 금액을 올리지만, 상대가 금액 조정을 원하면, 택배비 부담으로 한다던가, 반반씩 택배비를 부담한다던가, 조정 금액의 중간으로 하는 방법 등 여러 가지를 알려주었다.
딸의 방법은 나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주었다. 책을 사랑하는 방식이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을. 요즘 나는 책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경험했고, 딸은 경제적 가치를 창출했다.
나보다 현명하고 똑똑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책을 받으면서 “그 여성분도 딸과 같은 마음으로 책을 읽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최대한 깨끗이 책을 보려고 노력 중이다. 하지만, 습관이 어디 가겠는가? 거기다 남보다 2배는 늦게 읽어 많은 시간을 만져야 한다. 내가 깨끗한 책을 받았을 때, 기쁨을 얻은 것처럼, 딸이 받든 다른 주인을 찾아가든 깨끗하게 주고 싶어졌다.
도서관에서 지저분한 책만 보다 새 책을 보는 기분이 새로웠다. 도서관 책도 새 책을 빌리면 신경 써서 보게 된다. 하물며 내 책인데.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어찌 보면 책값이 가장 싸고 보관도 편한 데 왜 이렇게 아낄까?’ 내가 마사지 한 번만 덜해도 몇 권의 책을 살 수 있는데. 간사한 나의 마음에 웃음이 나온다.
이처럼 책은 단순한 종이의 묶음이 아니다. 그것은 기억과 경험, 사랑과 배움이 담긴 소중한 보석이다. 현재는 우리 가족에게 각자의 방식으로 빛나는 보석이 되었다.
20240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