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약해지면서 요 며칠 책 읽기가 힘들었다. 집중이 되지 않았다. 반년 이상 안 하던 책 읽기를 너무 열심히 해서 쉬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한동안 아무 생각 없이 드라마와 영화만 보았다.
오랜만에 ‘클래스 101’을 들었다. “나의 운명이 바뀌는 럭키 시크릿”이란 강의다. 듣는 내내 “나는 운이 있는 사람인가? 아닌가?”라는 생각을 곰곰이 해봤다.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우리의 삶은 마치 조용한 강물처럼, 잔잔하게 흘러가다가 갑자기 거친 파도를 만나게 된다. 나의 삶은 거친 파도가 더 많은 인생이었지만, 강렬한 파도 뒤에는 부드럽게 내리쬐는 태양이 있었다.
어린 시절 나는 마치 어두운 터널에 갇혀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남들이 겪지 못한 힘든 부모 밑에서 가난과 학대를 경험했다. 부모와 형제들 사이에서도 따뜻한 정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이처럼 그늘 속에 가려진 희망 없는 어린 시절이 미치도록 싫었다.
이런 어두운 터널을 지나며 깊은 교훈을 얻었다. 나는 자식들에게 내가 싫었던 가난과 어떠한 학대도 그들에게 하지 않고 사랑과 이해로 키울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물론 우리 부모의 성향을 모두 없애지는 못했다. 하지만, 어린 날의 고통은 내 마음속에 자리 잡은 연꽃처럼, 진흙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피워냈다. 아이들과 항상 대화로 타협점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내가 듣기 싫어하는 자존심 상하는 말은 아이들에게도 하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내가 받지 못한 사랑을 무한정으로 주었다. 그들의 눈높이에서 세상을 바라보며, 내가 부모에게 듣고 싶었던 “사랑하는 내 딸. 내 아들”이란 말을 하루에도 수없이 속삭였다. 이 사랑의 언어가 지금은 우리 가족의 가장 강력한 연결고리가 되었다.
나는 1남 3녀 중 막내다. 우리 형제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그냥그냥 평범해 보이지만, 만나면 자신들의 이익 차리기에 바쁘다. 남아 선호 사상이 강한 부모님 밑에서 서로를 아끼며 사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나는 언젠가부터 가족과 연락하지 않는다.
내가 아프다고 해서 그들이 도와줄 것도 아니고, 이해해 주지도 않는다. 아니 남보다 더 심하게 말할 때도 많다. 연락을 안 하면 스트레스를 덜 받는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다.’라는 말을 이때 쓰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기대도 정도 없다.
나는 내 아들딸에게는 반대로 가르쳤다. 서로를 의지하며 사는 법을 가르쳤다. 혼자보다는 둘이 있어 좋은 점을 강조하며 키웠다. 먹을 것이 있어도 똑같이 나누어 주고 없으면 서로를 챙겨주는 미덕을 가르쳤다.
어린 아들은 교회에서 간식을 주어도 먹지 않고 집으로 가져왔다. 나에게 주면서 반 자르라고 했다. 반은 누나 거고 반만 먹었다. 나는 “친구들 먹을 때 왜 안 먹었어?”라고 물어보면, 아들은 나만 쳐다보며 자기 몫 반만 먹었다.
딸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딸은 고등학교에서 놀러 갔을 때, 햄버거 세트가 남은 걸 보고 선생님께 동생 주게 남은 거 하나만 달라고 했다며 가져와 준 적도 있었다.
지금도 동생은 누나를 좋아하고 의지한다. 누나 또한 동생을 사랑하며 아껴 준다. 학원가지 않고 누나가 가르쳐 주는 공부에 만족해하는 동생. 두 남매를 보고 있으면 마음에 평안이 온다.
이렇게 자란 아이들은 나에게 “엄마는 현명하고 똑똑해서 좋다.”라고 말하며 나와의 대화를 싫어하지 않는다. 얼마나 감사한가? 자식에게 이런 말을 듣다니.
내 삶의 캔버스는 단순한 회색 조만은 아니었다. 남들보다 빨리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힘들었지만 좋은 경험이었다. 내가 다닌 곳은, 남들이 다니고 싶어 하는 대기업과 외국인 회사였다. 거기서 돈도 모았고, 회사라는 직장생활의 생리도 배웠다.
그 밑천으로 남들보다 늦게 대학에 갔지만, 거기서도 교수님들의 인정을 받아 장학금 받으면서 평탄하게 대학원까지 다닐 수 있었다. 이러한 여정은 화려한 색채로 가득 찬, 꿈과 희망의 풍경을 내 캔버스 위에 그려냈다.
경제적인 문제도 신기하게 그때그때 어려움 없이 해결되었다. 남들은 대학원 졸업해야 강의할 수 있었지만, 나는 대학원 때부터 시간 강사라도 할 수 있었다.
결혼은 내 인생의 새로운 불행의 장을 열었다. 아무것도 없는 남자를 만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심리적 고통과 이상한 경험을 수도 없이 했다. 결혼이라는 캔버스는 어두운 빛과 빗물과 같은 눈물로 얼룩졌지만, 그 속에서 두 아이라는 가장 소중한 보물을 얻었다.
두 남매는 내 삶의 가장 밝은 빛이었다. 끝도 없는 어두운 터널 속에서 좌절하고 결혼 생활을 포기하려고 할 때마다 힘을 준 원동력이었다. 엄마의 위력을 일깨워 준 아이들이다.
많은 걸 잃어가며 두 아이를 지켜냈다. 하지만 삶은 나에게 또다시 도전장을 던졌다. 유방암이란 끝도 없는 거친 파도를 11년째 만나 투병 생활을 하고 있지만, 이 파도도 나를 꺾지는 못했다.
결혼하고 학원 할 때, 들어놓았던 보험들의 혜택으로 돈 걱정 없이 투병 생활한 덕분에 지금까지 살아있다. 가끔은 ‘왜 죽지 못하고 이렇게 살아있을까?’라는 생각도 하지만, 아이들이 크면 클수록 나에게 주는 행복감이 커진다. ‘이런 행복을 갖기 위해 살아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남들은 고등학생 자녀들의 눈치를 본다는데, 우리는 그런 거 전혀 없었다. 나도 아이들도 서로 배려해 가며 살았다. 집에 가면 아이들과 웃으면서 남들이 느끼지 못하는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복잡하고 치열한 경쟁 속 서울에 사는 가정 중에 나처럼 자녀와 행복하게 사는 집이 얼마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보기 드물다. 이처럼 내 삶에 깊이 뿌리내린 가족의 사랑이 나를 지탱해 주고 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사랑의 말은 내게 새로운 삶의 에너지를 주고 있다.
경제적인 측면도 그렇다. 내가 아프면서 남편이 5년 이상 경제활동을 멈추었다. 다른 집은 몇 달만 수입이 없어도 살 수가 없단다. 하지만, 우리는 아무 문제 없이 지냈다.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힘들지도 않았다.
항상 좋은 일만 있을 수 없다고, ‘내가 아픈 것으로 나쁜 재앙을 몰아내고, 행복을 얻는 것은 아닐까?’라고 생각하니, 이 정도 투병 생활은 견딜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젠 그만 아프고 힘들어지고 싶다. 나도 일반인처럼 밖에 나가 일하고 싶다.
이처럼 내 삶은 마치 다채로운 물감으로 채색된 화폭과 같다. 어두운색의 무게감 속에서도 밝은색의 희망이 빛을 발하며 그 모든 것이 어우러져 나만의 독특한 그림을 완성했다.
오후에 아는 분이 오셨다. 학원 인수했는데 괜찮다고 한다. 나도 하고 싶었다. 정말 점쟁이 말처럼 55세부터는 새 인생을 살았으면 좋겠다. 그게 내년인데. 가능할까? 믿고 싶다.
나의 인생은 계속된 풍파에 휘말리고 있지만, 나는 항상 새로운 날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다. 우리 가족의 사랑, 아이들의 웃음, 그리고 내 안의 불굴의 의지는 내게 끝없는 힘을 준다.
내 삶의 책장을 넘기며, 나는 새로운 운을 기대하며 만들어 갈 것이다. 삶이라는 무대 위에서 계속되는 주연 배우로 서 있도록 나의 장을 만들어 가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