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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인경 Aug 24. 2024

떠돌이의 삶 : 통증 속 치료와 글쓰기 사이에서


삶은 어느 순간 나를 예기치 않는 길로 이끌었다. 나는 더 이상 집에 머물 수 없는 상태가 되었고, 병원이 나의 새로운 집이 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지금 나에게 있어 지금 가장 중요한 건 무엇일까? ‘암의 통증을 치료하는 것’이겠지?      




나의 시간은 이제 온전히 통증을 다스리고, 몸을 조금이라도 자연스럽게 만드는 일에 쓰이고 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나는 여전히 글도 쓰고 싶다. 쓰고 싶은 글,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시간과 여건이 주어지지 않는다.      

병원에 있는 나는 자식들과 많은 대화를 할 수가 없다. 글은 나의 소중한 자녀들에게 나의 마음을 남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에 내가 펜을 놓을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것조차 내 맘대로 되지 않는 현실이 밉다.     


참을 수 없는 통증이 시작된 이후로 나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 매일 쓰던 글을 이제는 일주일에 한 번도 겨우 쓸 수 있는 형편이다. 팔의 통증으로 손가락을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한다. 한편의 글을 쓰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고통이 따른다.     




병원에서의 하루는 치료라는 이름으로 나를 지치게 한다. 팔다리가 자유롭지 못한 나는 똑같은 일을 해도 시간과 노력이 몇 배가 된다. 부자연스러운 모든 행동이 나를 버겁게 만든다.     


지금 나에겐 어깨와 다리 통증을 줄이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매일 다양한 치료를 시도하며, 무엇이 나에게 가장 효과적인지 고민한다. 뜸도 여러 가지 종류로 해보고, 림프 마사지, 도스, 침, 부항, 산삼, 약침, 한약, 비싼 물, 경옥고, 공진단 등 각종 보약과 의료기기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치료를 시도해 보면서 나에게 맞는 방법들을 찾아나가고 있다.      




시행착오도 많았다. 지금은 아침이 되면 식사를 한 후, 발 고주파 기기를 한 시간 한다. 발에서부터 열이 올라와야 하지만, 통증이 심해 고주파가 발바닥을 뚫고 올라오지 못한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일라이트 장판을 엉덩이와 깔고 아픈 대퇴골에 올려놓는다.      


지금보다 몸이 좋았을 땐, 고주파의 전력이 일라이트 전기와 충돌되어 엉덩이가 까맣게 탄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거기까지 올라오지 못한다. 언젠가는 두 기계의 시너지가 만들어줄 거라 기대하며 꾸준히 치료하고 있다.     


한 시간 후, 온몸의 기력이 다 빠져나간 듯 힘이 없어진다. 온몸은 땀으로 범벅이 되고, 나는 욕조에 따뜻한 물을 준비한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면, 다리의 통증도 조금씩 가라앉고 아픈 팔도 움직일 수 있게 된다.     


이때 나는 어깨가 굳어지면 안 된다는 의사의 조언을 기억하며 왼손의 도움을 받아 오른손을 위, 옆, 앞 등으로 운동시킨다. 이 모든 치료는 엄청난 기력을 요구한다. 끝없이 흐르는 땀은 내 몸에 모든 수분을 빼앗아 가지만, 나는 멈추지 않는다.     


나는 체력을 유지하기 위해 내가 만든 생과일주스의 당분과 영양제, 많은 물을 마시며 최대한 체력을 유지한다. 중간중간 매트에 누워 휴식을 취하지만, 아무리 더워도 이 모든 노력을 한순간에 빼앗는 에어컨과 같은 난방기는 작동시키지 않는다.      




점심이 지나면, 병원에서 하는 도스나 림프, 뜸, 부항, 물리치료 등을 받는다. 마지막엔 마사지 의자에 몸을 맡기고 잠시 수면 모드로 지친 몸을 쉬게 해준다.      


저녁이 되면, 딸이 온 날에는 그녀의 마사지를 받지만, 혼자 있는 날엔 아침에 했던 고주파와 욕조를 이용한 치료를 반복한다. 그렇게 하루가 끝나가기 전 한약과 영양제 등을 챙겨 먹은 후, 바쁜 하루를 견딘 나의 몸을 침대에 맡긴다.      


이렇게 매일 반복되는 치료와 노력이 헛되지는 않은 듯, 날로 조금씩 좋아지는 걸 느낀다. 그러나 나의 체력과 의지가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까? 완치를 바라지는 않는다. 그저 통증만 줄어들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을 뿐이다.      




얼마 전, 아이들이 퇴원한 후 나는 병실을 옮겨야만 했다. 아이들과 함께했던 4인실을 우리 집처럼 편안했다. 아이들이 없는 지금은 혼자가 되어 1인실로 옮겼다. 짐을 옮기려니 많은 짐을 보면서 엄두가 나지 않았다.     


주말에 아이들이 퇴원하고 화요일에 딸이 와서 옮겨주기로 했지만, 내방에 오기로 한 분이 다른 방에서 불편해하시며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불편한 마음에 딸을 기다릴 수가 없었다. 내가 갈 방도 청소가 끝났다는 통보도 받았다.      


결국 나는 간호 보조사로 실습 나온 학생에게 부탁했고, 학생도 흔쾌히 승낙해 주었다. 짐을 정리하면 학생이 와서 내가 갈 방으로 옮겨주었다. 정리하는 짐은 끝이 없었다. 예전 같으면 혼자 금방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팔과 다리가 불편하니 몸을 구부리기가 쉽지 않았다. 3주간 아이들과 주문한 음료와 먹거리는 왜 이리 많은지? 많은 짐에 더하니 이삿짐 못지않았다. 학생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도 불평 한마디 없는 모습에 감사했다.      


이사온 새 방을 들어서자, 짐이 방을 가득 채워 문조차 열고 닫을 수가 없었다. 화장실 출입도 불가능했다. 몸은 이미 지쳤지만, 못된 성질이 널브러진 짐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한 손과 절뚝거리는 다리로 짐을 정리하니 하루가 다 가고 몸은 축 늘어졌다. 그래도 정리된 방을 보니 기분은 좋았다. 잠시 침대에 누워 생각에 잠겼다.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정말 이대로 사람 구실 못하고 살게 되는 걸까?     


짐은 왜 이리 많은 건지? 내 집은 도대체 어디인 건지? 평생 이렇게 떠돌이 생활로 생을 마감하는 건 아닌지? 병원 생활이 길어지면서 늘어나는 건 짐밖에 없었다. 하루를 살아도 집처럼 필요한 건 모든 게 있어야 했다. 처음엔 없으면 불편해도 참았다. 곧 집에 가면 되니깐!     


이젠 집은 더 이상 나에게 의미가 없다. 지금 있는 병원에서 5개월 정도 있을 예정이다. 1년에 집에 있는 날이 100일도 안 된다. 떠돌이 생활처럼 병원을 전전하며 살아가는 내 모습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내 인생의 끝은 어떤 모습일까? 지금의 내 모습을 보며, 눈물이 흘렀다. 생리 때문일까? 우울한 감정이 나를 뒤덮고 있었다. 두 달에 3번씩 하는 생리, 호르몬에 휩싸여 나를 감당하기가 점점 힘들어져 간다.     

 



하나님은 분명 감당할 수 있는 고통만 주신다고 하셨다. 내가 이 정도는 거뜬히 이겨낼 수 있다고 보시고 주시는 거겠지? 조금만 천천히 저에게도 행복이란 걸 느끼며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주세요!      


오늘도 나는 이 고통을 이겨내며 더 나은 행복을 꿈꾸며 잠을 청하려 한다. 내일은 오늘보다 조금 더 나은 날이 되기를, 그렇게 나는 오늘도 희망을 품고 눈을 감는다.     


2024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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