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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인경 Aug 17. 2024

집이 된 병원 : 아이들과 함께하는 소중한 시간


오래도록 지속된 투병 생활은 나를 집보다는 병원 생활에 더 익숙하게 만들었다. 이젠 집은 여러 병원처럼 잠깐 들러 휴식을 취하는 곳으로 변해 버렸다. 한때는 따스한 안식처였던 집이, 지금은 오히려 낯설게 느껴진다. 나는 문득 ‘집이란 나에게 어떤 의미일까?’ 생각해 본다.   

  

처음 유방암 판정을 받고 수술을 마친 후 집으로 돌아갔을 때, 가정은 세상에서 나를 가장 행복하고 편안하게 맞이 해준 공간이었다. 아이들이 기다리는 곳, 나의 소중한 모든 것들이 있는 장소였다. 집이란, 나의 전부였다. 하지만 지금은 병원을 오가며 빈 시간을 메우는 잠시 머무는 쉼터가 되었다.    

 



점점 커가는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점점 줄어드는 것이 늘 마음에 걸렸다. 그들의 행복한 웃음소리를 곁에서 들으며 지내고 싶었지만, 내가 집에 있는 시간이 내 귀한 보물들에게 부담이 되고 힘들게 한다는 걸 알았

다.     


점점 쇠약해지는 나는 병원으로 더 자주 발길을 돌렸고, 아이들 역시 나의 부재를 견뎌야만 했다. 엄마의 사랑과 따뜻한 돌봄을 충분히 받지 못한 아들딸은 몸도 나를 닮아 연약했다.     




딸은 생리통이 심해 진통제를 하루에 4알 이상씩 먹는다. 학교 다닐 땐, 지옥철인 지하철에서는 가끔 저혈당이 찾아와, 연락이 여러 번 왔었다. 너무 힘들 땐, 119를 부르고 싶어질 정도란다. 게다가 최근에는 허리까지 아프다며 심한 통증을 호소했다. MRI 검사 결과 디스크 소견까지 나왔다.      


아들은 어려서부터 약한 몸을 타고나 독감과 폐렴에 자주 걸렸다. 여름이면 에어컨 바람까지 더해 비염을 달고 산다. 운동을 좋아하지 않는 아들은 누워 있기를 좋아했다. 그래서인지 자세가 좋지 않아 척추측만증이 가슴까지 있다고 한다.     




모든 게 나의 부재에서 온 것 같다. 어린아이들을 두고 길어진 투병 생활은 그들에게 소홀한 엄마로 남게 만들었다. 나는 항상 그 죄책감에 미안한 마음이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이제는 언제 죽을지 모를 “유방암 뼈 전이”라는 판정까지 받았으니, 죄책감이 더욱 깊어졌다.     


아이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고 보살펴 주고 싶은 마음이 커지던 어느 날, 나는 고민 끝에 방학 동안 아이들과 병원에 머물기로 마음먹었다. 아이들은 항상 부족했던 치료를 받으며 나와 시간을 보내면서 그들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다행히 아이들이 어렸을 때, 그들의 건강을 위해 들었던 여러 보험 덕에 나는 내가 원하는 걸 조금이라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엄마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한 아이들이었지만, 엄마의 선택을 기꺼이 따라 주었다.     

 



7월 마지막 주, 내 귀한 보물들을 데리고 포천에 알아본 한방병원에 입원했다. 내과 한의사님과 정형외과 선생님이 믿음을 주었고, 병원은 우리 가족만을 위한 공간을 마련해 주었다. 그렇게 우리는 다시 하나가 되었다.      

벌써 2주가 지나 퇴원일이 다가왔다. 오랜만에 아들딸과 지내며 그 어느 때보다 행복했다. 훌쩍 커버린 자녀들이 듬직했고, 그들을 바라보는 순간순간이 자랑스러웠다. 엄마를 살리겠다고 매일 마사지 해주던 딸도 그동안의 긴장이 풀린 듯 자신의 치료와 오랜만에 느끼는 휴식을 만끽했다.     


엄마가 아이들을 돌봐주어야 하지만, 지금은 아이들이 엄마를 돌봐주는 상황이 되었다. 엄마의 불안한 걸음걸이와 자유롭지 못한 팔에 걱정하며, 항상 나를 주시했다. ‘혹시나 넘어질까? 갑자기 통증이 심해지면 어떻하나?’ 늘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지켜보는 그들의 눈길이 따뜻하면서도 마음 한편에 미안함이 가득했다.     




이런 아들딸이 퇴원했다. 나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고민이 많아진다. ‘혼자 잘 지낼 수 있을까?’ 엘리베이터 앞에서 신발에 걸려 넘어질 뻔한 며칠 전 일이 떠올랐다. 그때부터 다리의 통증이 심해져 움직이지 못했다.     

진통 주사를 맞고 누워있었지만, 통증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 곁에서 마사지를 해주는 딸은 괜찮은지 물었다. 매일 마사지와 시중을 들면서 나에게 삶의 의미를 알려주는 딸이다. 아들 또한 엄마가 불편하지 않도록 작은 부탁도 웃으면서 들어 주었다.

     

이런 나의 보물들이 떠나면, 나는 다시 혼자가 된다.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물건을 떨어뜨리면 누가 주워줄까? 식당가서 혼자 밥을 먹을 수 있을까? 배식을 시켜야 하나? 지금처럼 갑자기 통증이 오거나 문제가 생기면 누가 나를 챙겨줄까?’ 이런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지금 나의 초라함과 외로움은 누가 채워줄까? 스스로 감당해야 하는 줄 알면서도 마음이 쉽지 않다. 아이들과 어떻게 하면 좀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 항상 병원에 있는 나는 매일 밤 기도한다.     




하나님!

저에게 다시 한번만 기회를 주세요!


아이들과 행복한 시간을 좀 더 보낼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완치는 바라지도 않습니다. 그저 통증만 사라지고, 더 이상 암이 커지지 않게만 해주세요. 우리 딸 기도처럼 90살까지는 감히 기대하지 않겠습니다. 아들이 대학에 가고, 군대를 다녀와 직장 다니는 모습까지만 볼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거 같아요.     


오늘도 나는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간절히 원하며, 소중이들과 함께했던 병실의 작은 방을 그리워한다.     

2024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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