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과 배신의 상처:선택과 치유의 시간

by 김인경

말복이 지나 한 이틀 많은 비가 온 뒤로 더위는 한풀 꺾인 듯하다. 아침에 동네 한 바퀴 돌며 산책해도 비 오듯 흐르는 땀은 멈추었다. 이젠 귀뚜라미 소리도 들리는 것이 가을이 성큼 다가오고 있음을 알려준다.

숨이 막히게 가슴이 조여오는 느낌, 마음이 아리고 심장이 쿵쿵 뛰는 소리를 수시로 듣는다.

아들이 초등학생일 때, 같은 반 학부모에게 상처를 크게 받은 이후로, 동네 사람들과는 어느 정도 거리감을 두고 지낸다. 운동에 가서도 아시는 분이 먼저 인사를 하면, 웃으면서 답례 인사 정도만 하고 깊은 관계를 피해 왔다.

일이 생기면 주위에서 도와주시는 분들이 생긴다. 예상하지 못한 일이 터졌을 때, 뜻밖의 도움은 고마운 마음이 평생 가는 듯하다. 나와의 인연으로 도움을 주셨지만, 내 자식들까지 챙겨주면 그 고마움을 잊을 수가 없다.

나에게 처음 유방암 손님이 찾아왔을 때, 우리 아이들이 초등학교 1학년 4학년생이었다. 키즈카페의 아르바이트생도 갑자기 그만두어 남편은 경제활동에 매달려야만 했다. 나는 수술을 앞두고 아이들 식사가 걱정되어 동네 식당 몇 군데를 돌아보았지만, 아이들이 싫다고 해서 결정을 못 했다. 일하는 아주머니를 구하고 싶었지만, 모르는 사람과 있기 싫다는 아이들 때문에 포기했다.


반찬이 가장 문제였다. 그때 한 동생이 전화가 왔기에 좋은 반찬가게나 식당 좀 추천해 달라고 했다. 밖의 음식을 먹지 않는 나의 제안에 놀란 동생은 상황을 듣고 “언니! 걱정하지 마세요. 내가 알아서 아이들 반찬 매일 아침에 집으로 가져다 놓을게요”라고 너무 쉽게 말해주었다. 15일 동안 매일 국과 반찬을 골고루 해다 주면서 인증사진까지 보내주었다.


남편은 과일 몇 번 사주었다고 했지만, 퇴원 후 나는 식사랑 동생 딸들이 좋아할 만한 선물을 몇 번 했다. 몇 년이 지난 후에 갑자기 금에 관심을 가진 나는 작지만 이쁜 팔지를 마지막으로 선물해 주었다. 동생은 정말 고마워했다. 지금은 그 동생과 자주 연락을 못하지만, 아직도 그때의 감사한 마음을 잊지 못한다.




약 7년 전 운동하는 곳에서 만난 언니가 유난히 나를 이뻐해 주셨다. 나에 대한 좋은 말을 할 때마다 웃으면서 "감사합니다"라고 보답의 답변은 해주었지만, 그 이상의 깊은 관계를 유지하지는 않았다. 코로나로 내가 다니던 센터가 문을 닫았다. 처음 몇 년간은 나를 이뻐해 주신 분들이 가끔 연락을 주셨지만, 내가 먼저 연락하지는 않았다.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대부분 연락이 끊어졌다. 그중 한 언니가 한두 달에 한 번씩 꼭 안부 전화를 주었다.

작년 4번째 유방암 수술이 끝나고 병원에서 수술 회복이 힘들어 많은 고생을 할 때였다. 설상가상으로 남편까지 교통사고가 난 것이다. 남편도 입원하고 나도 입원 중이었다. 처음으로 아이들 둘만 집에 있게 되었다. 그때가 바로 수능 2주 전이었다. 수능을 코앞에 둔 딸과 아무것도 모르는 철없는 아들 둘이 살아가야만 했다. 걱정이 많은 나는 딸에게 연락하면,

"엄마! 내가 몇 살? 왜 걱정해? 걱정하지 마! 밥하고 살림하는 친구도 있어." 하면서 항상 나를 위로해 주었다.

나의 걱정을 가끔 전화 오는 분들에게 말을 했고, 생각지도 않았던 몇 분이 도움을 주셨다. 한 분은 우리 구역장님이시다. 기도라도 해달라고 현재 상황을 말씀드렸더니, 딸이 좋아하는 갈비탕을 사다가 문 앞에 놓고 가신 것이다. 아빠가 퇴원하기 전까지 중간중간 아이들과 아이들 음식에 신경을 써 주셨다. 나는 너무나 감사했다.

운동에서 이쁘다며 가끔 연락이 오던 언니도 돼지불백과 김치를 담갔다고 아들에게 주고 간 것이다. 생각지도 못한 도움이었다. 구역 동생도 수능 전에 몸보신해야 한다며 닭죽을 만들어 딸에게 준 것이다. 나는 이 모든 호의가 감사하면서도 당황스러웠다. 내가 해 준 것도 없는데 여기 저기서 성심껏 힘들게 만든 귀한 음식들을 주신 것이다.

퇴원해서 집으로 돌아간 나는 비타민과 식사 등 그들이 주신 마음과는 비교도 안 되겠지만, 나름대로 감사의 표시를 조금이나마 했다. 이런 계기로 운동에서 만난 언니와 사이가 더욱 돈독해졌다. 친구나 가족들도 멀리서 살고 서로의 바쁜 사생활로 자주 보지는 못한다. '가족이나 친구보다 지금 내 곁에서 나에게 잘해 주는 이웃사촌이 낫다.'라는 말이 있듯이 고마운 분들과 자주 만나게 되었다.



만날수록 나와 가치관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웬만하면 웃으면서 맞추는 성격이라 별문제 없이 잘 지내왔다.


어느 순간 한 분씩 나에게 실망들을 안겨주었다. 나는 다시 연락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없을 때, 내 자식에게 잘해 준 분들이라 무시하지 못하고 관계만은 유지했다. 다시 한번 후회했다. 그때 끊었어야 했는데….

개인적인 친분으로 만나는 사람은 '믿음으로 무슨 일이든 거짓 없이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편한 만남이어야 한다. 믿음 없는 만남은 안 만나는 것보다 못하다'라고 생각한 나는 거짓말을 하면 더 이상 관계를 유지하지 않는다.


고마운 마음에 운동에서 만난 언니와 예전에 내가 많은 도움을 주었던 언니, 이렇게 세 명이 여러 번 식사하였다. 나의 바보 같은 성격이 언니들을 또 한 번 철석같이 믿은 것이다.


수다스럽고 푼수 끼가 있는 나는 창피한 것도 없이 만나면 모든 걸을 오픈한다. 그러면 상대방도 오픈하여 서로 이해하고 공감해 주면서 더욱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나의 일반적인 인간관계이다.


언니들도 당연히 그런 줄 알았다. 힘들어하는 내 앞에서는 나를 위로하는 척! 뒤에서는 내 험담과 거짓말을 한 것이다. 그러다 서로 사이가 틀어지는 계기가 생겼다. 자신들의 잘못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나에게 상대를 욕하기 시작했다. 자신들은 서로 잘못이 없고 상대들만 잘못이 있는 것이다. 나는 두 언니 모두에게 실망했다.


그날 밤 나는 1분도 잠을 못 잤다. 다음 날 새벽, 긴 장문의 편지를 두 언니에게 썼다. 편지의 주요 내용은 '내가 언니들을 안게 7년, 10년 이상 되었는데 내가 너무 바보였다고…. 나는 신뢰가 없는 만남은 돈 낭비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니 우리의 인연은 여기까지인듯합니다'라는 내용을 카톡으로 보냈다.


한 언니는 "웃고 얘기하던 때도 많았네. 그동안 즐거웠고 잘 지내"라고 짧은 답장이 왔다. 한 언니는 며칠 동안 전화와 만나서 나를 설득하고 긴 장문 메시지를 나중에 읽어본 뒤 답이 없다.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사람에 대한 배신감을 요즘 연달아 느끼는 것 같아 마음이 너무 아프다.



며칠 전부터 잠을 못 자 몸이 매우 힘들다. 글도 안 써지고 책도 눈에 들어오질 않는다. 어떤 의욕도 없다. 빨리하고 싶은 것은 많은데 몸이 잘 따라주지 않는다. 믿었던 동네 언니 2분을 손절하고 더 심해진 것 같다.

겉으로는 독하고 냉정하게 행동하지만, 우리 아버지를 닮아 속정에 약한 나는 마음이 쓰리고 아리다고 해야 하나? 지금 심정이 그렇다.


예전에는 이런 기분이 싫어 인간관계에서 내가 먼저 손절을 하진 않았다. 그냥 참거나 모르는척했다. 하지만 알고도 모르는척할 때, 나의 행동은 부자연스럽다. 상대도 뭔가 찝찝함을 느끼게 된다. 인간은 쉽게 변하는 동물이 아니기 때문에, 결국에는 서로의 상처가 더 깊어져서 큰소리 내며 끝낸 기억이 있다. 그 뒤로는 망설이지 않고 일이 생겼을 때, 조목조목 따져가며 나의 감정 표현을 다 하고 정리한다. 사과로 끝날 수 있는 건 사과로 끝내지만, 아닌 건 서로의 상처를 최소한으로 큰소리 없이 손절한다.


이처럼 인간관계에서 실망하고 상처받는 순간들이 누구에게나 올 수 있다. 이때의 감정을 잘 다루는 것은 쉽지 않다. 인간관계에서 실망을 느낄 때, 그 상황을 개선하거나 해결하려는 노력은 누구나 하겠지만, 때로는 그 관계를 더 이상 유지하지 않는 것이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상황과 상대방의 행동을 평가하고 결정하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에, 내 마음의 편안함을 먼저 고려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2023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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