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세가 보이기 시작했던 중3 때부터 지금까지 12년이 흘렀다. 고등학교 때 까지는 살면서 누구든 한 번씩은 겪을 시기를 일찍 맞이한 것이라는 생각에 매도 일찍 맞는 게 낫다고 스스로를 위로했었다. 인생이 뿌리째 흔들리는 이 경험을 예를 들어 가정을 꾸린 상태에서 맞이한다면 지금보다 더 허무하고 괴로울 것 같았다. 그 당시에는 그동안 살면서 한 노력과 선택을 전부 부정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한창 성장하고 사회 안에서 여러 경험을 할 수 있는 10대 후반부터 20대 거의 대부분을 우울감과 보내게 될 것도 예상하진 못했다. 나는 우울에 젖어 일상에서 신경 써야 할 것들을 하나 둘 포기해나갔다. 노력하지 않는 시간들이 쌓였고 앞으로의 인생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20대 초반까지도 중학교 때까지 열심히 쌓아놓은 것을 까먹으면서 살았는데 이후로는 더 이상 기댈 곳이 없었다. 새로 까먹을 것이 없었다. 나아갈 의지도 없고 자빠져있을 여유도 없이 그저 살아있는 시간들이 길어졌다.
실패작. 인생이 망했다는 생각은 우울 초기의 주범이었다. 지금의 내가 이 모양 이 꼴이니까 더 좋아질 것을 꿈꿀 수도 없었다. 긍정적인 자아상과 스스로에 대한 믿음은 박살이 났다. 죽고 싶도록 끔찍하게 숨통을 죄어 온 것은 나를 둘러싼 환경에 부정적으로 반응하고 있는 나 자신으로부터 출발했다. 어느 곳에 있어도 무엇을 보아도 지옥이었다. 세상은 내 거울이라는데 가족 안에서는 혐오와 탓하기를, 친구와의 관계에서는 질투와 절망을, 그 외에 다른 관계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거부감이 일었다.
그렇게 힘들어지면 자기 탓을 하거나 남 탓을 하거나 세상 탓을 하거나 다 하게 된다. 그리고 삶은 굉장히 괴로워진다. 그러고 나서 생기는 것은 커다란 자괴감 그리고 그간 보지 못했던 분노다. 그렇지만 그 시기에 느꼈던 고통은 그간 공감하지 못했던 다른 사람의 눈물들을 마음 깊이 이해하게 해주기도 했다. 한 사람의 보이는 것 이외의 것을 궁금해하고 이해하는 능력은 관계에 커다란 변화를 주었다. 그것은 자유이기도 했다. 그리고 괴로움에 지쳐 다시 살아보려 하다 보면 애초에 나를 힘들게 한 원인이 된 생각들을 하나하나 짚어보고 사실인지 아닌지 유무를 따져보는 날이 온다. 도움이 안 되는 것들은 고치려고 노력하게 되고 그렇게 점점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는 힘을 기르게 된다.
지난 12년 동안 우울을 발견하고 거부하고 떼어내고 포기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을 거쳤다. 때론 반복했다. 우울은 어감 때문에 암울함, 울적함, 어두움, 처짐, 슬픔, 밍밍함으로 가득하게 들린다. 하지만 내가 경험해온 우울은 세상 모든 것처럼 다양한 면이 있다. 우울은 살면서 이해하지 못했던 사람들을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내가 필요한 것들을 가졌음에도 인간은 슬프고 아플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친다. 의지만으로 안 되는 것이 있다는 것을 가르치고 살면서 나에게 실제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내가 누구인지 세상의 눈이 아니라 나의 눈으로 보는 것을 가르친다. 그 과정을 거치면 인생에서 불필요한 것들은 제거된다. 그리고 충분히 숙고한 것이기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더 단순하고 단단해진다. 그렇게 우울은 삶에 여유를 선물한다. 우울은 의식보다 더 깊은 곳에 있는 자신이 선택한 생존 방식일지도 모른다. 가야 할 곳으로 갈 수 있도록, 삶이 우리를 가르치는 방법 중 하나인 것이다.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그런 것들은 대부분 배운다고 마음에 새겨지는 것들이 아니고 몸으로 겪어나가야 하는 것들이다. 배움의 속도는 누구나 다르고 그것이 우열과 열등을 가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세상을 감각하는 몸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는 쉽게 찾아오진 않는다.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 사이에서 나 자신을 증명해내야 하는 청년들은 어쩌면 우울로 더 깊이 자신 안으로 침잠해 들어가 앞으로 나아갈 길을 자기 안에서 찾고 단단히 다지고자, 의식하지 못하는 새에 우울을 선택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우울을 이제 친구라고 부를 수 있다. 내 소중한 일부를 잃었고 지난한 시간들과 함께 가능성들도 사라졌고 회복해야 할 망가진 습관들이 남았지만 그래도 나는 이 친구 덕분에 전보다 더 분명한 시선으로 사랑하면서 살고 있다. 우울은 분별을 가르치고 현실을 보게 하며 세상을 이해하는 힘을 길러준다. 그래서 우울의 다른 말은 지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