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 없는 과거와 현재가 뒤섞인 역사
나는 대학교에서 연기를 전공했다. 내가 대학을 갈 수 있었던 것은 운과 우리 부모님 덕분이었다. 엄마는 다이어트를 하는 나를 위해 매일같이 새벽기도 후 아침에 고기와 야채들을 구워주셨고 연습 후에 집에 돌아와 뻗어있으면 아빠와 다리 한 짝 씩을 잡고 주물러주셨다. 집안일을 도맡아 하시면서 내가 입시 외에 다른 것에는 신경 쓰지 않도록 만들어주셨다. 내가 상담을 받을 수 있도록 하셨고 본인도 상담을 받으며 심리 공부를 시작하셨다. 아빠는 차로 학원에 데려다주시기도 했고 금전적으로 늘 지원해주셨다. 학교 시험을 볼 때도 차로 함께해주셨다. 두 분은 대학교에 붙고 나서 나보다 더 먼저 결과를 확인하고 좋아하셨다.
그리고 입학 후 6년이 지났을 시점에 나는 내가 어릴 적부터 정서적 학대를 당했음을 확신했다. 고등학교 때는 나 자신과 나를 낳고 기른 엄마를 가장 혐오했었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줄 알았던 우울함은 그곳에서 시작되었다. 나는 무의식 중에 우리 가족들을 공격했다. 자려고 누우면 방 바깥에 저만치 가족들의 머리가 바닥에 잘린 채로 놓여있었다. 끔찍해서 눈을 감으면 머리들이 늘 같은 순서대로 잘려나갔다. 엄마, 아빠, 오빠 그리고 가장 마지막은 나였다. 나중에 상담을 받으면서 알게 된 것인데 겉으로 표출하지 못한 분노가 그 그림을 만들어 낸 것이고 마지막이 나인 이유는 죄책감 때문이었다. 머리카락과 피가 엉겨있는 축축하고 역겨운 화장실의 타일 바닥, 시도 때도 없이 조그마한 자극에도 내가 스스로를 해해서 죽는 상상이 머릿속에서 저절로 일어났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자 날카로운 것, 뜨거운 것을 보면 엄마를 해하는 충동이 일었다. 실행할 의지는 없었지만 아찔한 상상들이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펼쳐지던 시절이었다.
그 당시 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아침마다 학교에 등교하고 돌아와서는 먹고 영상을 보고 자는 것뿐이었다. 그 외에는 밖에 나가야 하는 모든 일이 전부 버거웠다. 가족들과 외식하러 나가는 것도 어려웠다. 가족과 함께하는 것도 식당에서 다른 사람들을 마주하는 것도 싫었다. 베이커리 가게에 가면 먹고 싶은 것을 고르는데 10분 이상씩 걸렸다. 내가 원하는 것을 선택할 자격이 없었다. 내가 선택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갈등하다가 울화를 느끼며 빈손으로 집으로 향하기도 했다. 빵 하나도 고르지 못하는 나 자신을 죽여버리고 싶었다. 그렇지만 나는 완전히 절망하지는 않았다. 부정적 감정에 쉽게 휩쓸리곤 했지만 아직 스스로를 포기하지는 않았었다. 그러다가 나를 놓아버리는 순간이 왔다.
그날은 낮이었고 나는 혼자 내 방에 있었다. 창문을 열고 싶었다. 방범창이 설치되어 있어 그 사이로 손을 넣어 열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지만 1년 넘게 열어오던 평범한 창문이었다. 하얀 창살 사이로 손을 넣어 유리창을 밀었다. 잘 밀리지 않았다. 우울할 때는 시력에는 이상이 없지만 시야가 제한된다. 가운데를 제외하고는 하얀 막이 껴있는 것 같은데 혹시 창문이 잠겨있는지 고개를 들어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모든 것이 짜증이 났고 귀찮았다. 유리창을 다시 미는 것이 불가능하게 느껴졌다. 창문을 열지 못하는 상황을 인식하자 순식간에 애써 붙잡고 있던 선이 끊겨버렸다. 이 순간을 끈질기게 기다려 온 절망에게 온 몸을 내어주었다. 더 이상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행동을 조절할 수 없었다. 지켜야 할 규칙도 사라졌다. 식탁에서 밥을 먹다가도 바닥에 누워 잠들었고 책상에 앉아 펜을 드는 일도 없었다. 지켜보는 내 안의 또 다른 나는 가슴 철렁이며 의미 없는 하루들이 반복되는 것을 목격했다. 파괴하고 있었다. 결국 스스로에게 안 좋은 것임을 알면서도 멈추지 않고 행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다리가 붓기 시작했고 살찐 몸을 보며 충격을 받았지만 위가 차서 불쾌감이 느껴져도 아플 때까지 먹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다이어트를 해야 한다고 다시 엄격하게 제한하고 모든 음식의 칼로리를 계산했다. 그리고 또 먹고 나서는 자괴감에 시달렸다. 그리고 극심한 변비. 내 인생처럼 막힌 변기를 뚫고 또 뚫었다. 집에 들어가면 아빠는 거실에서 뒷모습을 보이며 컴퓨터로 주식 창을 보고 있거나 소파에 배를 까고 앉아 티브이를 보고 있었다. 아빠의 휴대폰은 집에서도 자주 울렸다. 나는 아빠가 지난날 협박했던 것처럼 진짜로 자살할까 봐 걱정했고 엄마가 마음 고생만 하다가 병에 걸려 죽을까 봐 불안했다. 오빠는 내 삶에 거의 부재했다. 넷이서 함께 집에 있는 공기는 처참했다. 쳐진 얼굴들. 각자의 위치에서 고독하고 불행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서로 알아주지 않는 애를 썼다. 할 말은 건너 건너 전달되었고 몇 마디 이상 이어지면 싸움이 났다. 조용하고 건조했다. 부엌에서 엄마가 요리할 때 나는 소리와 생활소음을 제외하고 우리는 걱정과 짜증 그리고 비난 외에는 주고받을 것이 없었다.
엄마는 우리 가족이 연기를 한다고 했다. 밖에 나가면 아무 이상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연기. 우리 가족 전체가 보여주기 식으로 연결되어있었다. 나는 나이기 때문에 사랑을 받지는 않았다. 엄마와 아빠의 딸이기에 보호를 받고 사랑을 얻었다. 아무도 있는 그대로의 나를 봐주지 않았다. 딸이기 때문에 요구되고 해야만 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건 가족 구성원 모두에게 적용되었다. 오빠를 제외하고. 오빠는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요구하고 해냈다.
오빠는 중학교를 다닐 때 어느 시점 이후로 나를 아예 투명인간 취급을 했다. 인사도 안 했고 말도 걸지 않았다. 쳐다보지도 않았다. 낭비라는 듯이. 우리가 인사를 시작한 것은 오빠가 군대를 다녀오고 난 후부터다. 눈을 마주치지 않고 입으로 건네는 인사조차 커다란 도약이었다. 훗날 오빠는 아빠가 추진해서 간 가족 여행에서 맛있게 저녁을 먹고 바로 앞에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멋진 숙소 거실에서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미안하지만 엄마 아빠 돌아가시고 나면 우린 바로 남이야.'라는 말을 내뱉었다. 눈에는 독기가 가득했다. 이유를 분명히 알 수 없이 긴 세월 미움을 당하고 있었다. 엄마나 아빠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부모님은 우리 사이에 있어서 언제나 방관자였다. 한쪽 벽이 통유리인 화장실의 샤워부스에 들어가 어처구니없이 눈물을 흘렸다. 내가 연애를 하지 못하는 것은 아빠와 오빠 때문이 분명했다. 그들을 향해 정당하게 표출하지 못한 불신과 분노 그리고 억울함이 내가 만나는 남성들에게 투영되어 사랑받고 싶어도 그렇다고 말하고 행동하지 못하게 막았다.
내가 한국에 없는 사이 엄마를 때리고 목을 조른 아빠. 청소하는데 자꾸만 나오는 긴 머리카락과 의심하는 엄마를 모자란 사람 취급했던 아빠. 필리핀 골프 여행을 가서 '에이급'과 노는 아빠. 주식을 도박처럼 집을 걸고 하는 아빠. 갑상선 암 수술을 하고 나서도 말리는 가족들 마음은 생각 않고 술을 마시는 아빠. 어릴 적 내 잠지를 씼겨주었던 아빠. 밤이 되면 엄마의 가슴에 손을 찝접댔던 아빠. 그 손목을 몇 번이나 내쳐버리고 싶었는지 잘라버리고 싶었는지 아빠는 모를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에 어릴적부터 마음이 무너지든 타들어가든 신경쓰지 않던 아빠와 연을 끊고 싶다는 복수심 그리고 아빠가 주는 돈으로 살고 있다는 자괴감 그리고 본인의 가정 안에서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아본 기억이 없는 아빠가 나에게 주려고 노력했던 사랑은 내가 아예 이 불편한 사실을 외면하게 만들었다. 가족 중 누구도 문제를 해결할 힘 또는 의지가 없었고 나는 아빠에게 폭행에 대한 사과를 요구한 후 적당히 거리 유지하기를 선택했다.
엄마는 벽에다 대고 말을 하는 기분으로 살았다고 했다. 아빠는 자기 마음대로 했다. 그렇지만 아빠의 말도 엄마의 귀에 가닿지 못했다. 엄마는 경제적인 면에서 불안감이 커지자 분노가 쌓이고 우울해졌다. 그리고 오빠와 나를 길렀다. 엄마는 꼭 오빠와 나 사이에서 오빠 편을 들었는데 아빠가 나를 오빠보다 더 예뻐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오빠는 자기 고집대로 하는 일이 많았고 초등학교 때까지 엉덩이가 새까매질 정도로 맞았으며 나는 오빠를 감싸다가 얻어맞았다. 엄마의 분노는 불쑥불쑥 우리를 향했다. 엄마는 화가 나면 아무 말을 하지 않고 부엌에서 밥을 지었다. 그리고 엄마가 상을 차리면 나는 배가 고프던 고프지 않던 기분이 상해서 음식이 들어가던 안 들어가던 밥을 먹어야 했다. 엄마는 자식이 자기를 무시하는 것 같으면 참을 수 없었고 밖에서의 관계에서도 피해의식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엄마가 못나보였는데 크면서 엄마를 닮은 내 모습들을 발견하고선 가슴이 내려앉곤 했다.
나는 집에서 주로 티브이를 봤다. 그리고 티브이를 봤다. 채널을 돌려가면서 열심히 시간을 흘려보냈다. 영화가 끝나면 또 다른 영화를 볼 게 없으면 안 봐도 될 예능을 볼 게 없으면 홈쇼핑을 드라마가 하면 드라마를 봤다. 끊임없이 채널을 돌려가며 해야 할 일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불편한 마음으로 그 앞에 앉아 일어나야 하는 마음과 앉아있으려는 마음이 싸우도록 내버려두었다. 싸울수록 속에서는 불이 났고 머리가 어지러워서 더 이상 볼 수 없는 지경이 되면 일어나서 자괴감에 몸을 흠뻑 적셨다. 익숙한 루틴이었다.
집에 아무도 없으면 방에서 야동을 봤다. 나는 초등학교 때 처음으로 야동을 접했다. 오빠가 컴퓨터에 야동을 깔아놓은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 전에는 세상에 자기 벗은 몸을 촬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인터넷에서 야한 사진을 검색하는 것은 별로 수확이 없다고 믿었다. 그런데 웬걸. 내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나는 오빠에 대한 의리로 오빠가 남긴 흔적들을 부모님이 보기 전에 대신 지웠다. 그러나 야동을 한 번도 안 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본 사람은 없다는 말은 내게도 적용되었다. 처음으로 본 남녀의 음부에 제멋대로 난 털 그리고 성기가 결합한 모습은 충격을 넘어 혐오스러웠다. 그리고 자극적이었다. 이후로 나는 종종 야동을 보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생각을 돌린 날들도 있었지만 우울해지면 자포자기가 되었다. 그냥 봤다. 몇 시간이고 집에 누군가 올 때까지 봤다. 그 행위들과 몸에서 일어나는 반응이 신기하면서도 징그럽고 배우들의 연기 기와 카메라의 시선이 불쾌했기 때문에 하고 싶다는 생각이나 만지고 싶다는 생각은 위험하게 느껴졌다. 궁금하지 않았다. 나는 나에게 자물쇠를 걸었다. 그리고 굳건하게 오래도록 그것을 지켜야만 했다.
뒤돌아보면 일상을 살면서 나는 무의식적으로 온 의식을 집중할 대상을 끊임없이 만들었다. 나에게 유희를 주는 그 무엇. 동물, 가수, 배우, 짝사랑 대상, 영화, 연기 등 대상은 다양했다. 그것들이 일상을 덮었고 대면하지 못하는 감정을 마주하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온 마음과 에너지가 대상으로 몰려서 스스로 조절할 수가 없었다. 마음이 그곳에 착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자꾸만 생각하고 집착했다.
최근에 아버지의 환갑 생일 식사에 가기 전까지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안 가면 서운해할 아빠의 모습과 엄마의 실망 그리고 오빠의 비난. 가족들에게 안겨줄 걱정 또는 불편함 또는 패배감. 선물로 딸의 자살 소식을 들려주고 싶은 마음이 일어났다. 수동적인 공격을 하고 싶구나 알았다. 결국 나는 약속시간에 늦었다. 입은 옷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지갑이 보이지 않았다. 여유 있게 일어나서 그런 식으로 늦었다. 예약된 방의 문이 열렸는데 아무도 나를 비난하지 않았다. 오히려 반겨주었다. 나 때문에 삼십 분이나 주문을 못하고 있었는데도 배가 고팠을 텐데도 싫은 소리 하나 하지 않고 어떻게 이렇게 금방 왔냐고 물어보셨다. 지하철에서 내 귀에 박힐 원성들이 맴돌았다. 예전으로 돌아가서 죽고 싶은, 포기하고 싶은, 놓아버리고 싶은 감정에 젖어있었다. 그러나 식사 자리에서 무언가 바뀌어있었다. 우리 네 명 다 예전의 우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안도감과 배려하는 마음이 전해져 왔다. 비난이나 책망 대신 나를 보듬어 주었다. 가족처럼, 내가 그토록 오랫동안 바라왔던.
식사는 순탄하게 마무리되었고 우리는 다 같이 한 차에 타서 한 명씩 차에서 내렸고 그렇게 다시 각자의 시간 속으로 흩어졌다. 식사 이주 전부터 마음을 무겁게 누르고 종국에는 자살이라는 무시무시한 단어를 다시 떠오르게 한 아빠의 환갑 식사는 그렇게 금방 지나갔다. 모든 것은 정말 겪어내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다. 별거 없다. 별 것으로 만드는 것은 나의 생각과 감정일 뿐이다. 나는 생애 처음으로 좋은 호텔에서 식사를 했고 아빠와 똑 닮은 그림을 넣은 케이크를 든 아빠의 사진을 즐겁게 찍었고 함께 웃었다. 그리고 엄마는 만날 때마다 그랬듯 내 손에 이것저것을 담은 종이백을 건네주셨다. 오빠와는 몇 마디 대화를 나눴다. 경계하느라 바빠 더 축하해드리지 못해서 아쉬운 마음이 머쓱하게 남았다. 혹여나 아빠를 서운하게 했을까 걱정하고 있었다. 아빠는 환갑을 어떻게 느끼셨을까. 편지 한 장 건네지 않은 마음이 찝찝하게 남았다.
나는 부모님에게 여러 번 편지를 썼었다. 고등학교 때는 교감이 절실해서 미친 듯이 개와 고양이 사진을 찾아보다가 전지에 편지를 쓰기도 했었다. 고양이에 대해 공부해온 정보와 어떤 종을 어떻게 키울 것인지 그리고 내게 고양이가 필요한 이유를 상세하고 간곡하게 적었었다. 그 외에도 여러 번 부모님을 사랑하는 편지, 용서하는 편지, 축하하는 편지 등 때로는 힘겹게 그렇지만 진심을 꽉꽉 담아 건네었었다. 하지만 나는 한 번도 답장을 받지 못했고 엄마는 노력해도 복잡한 감정 때문에 쓰지 못했다는 말을 돌려주셨다. 뭐랄까. 그 이후로 더 이상 엄마 아빠에게 편지를 쓰지 않게 되었다. 나만 속마음을 다 내보인 것 같은 배신감 때문이었다. 사랑한다면 글로 적지 못할 이유는 무엇인가. 사랑을 매일 같이 평생을 받았으면서도 부모님을 의심하고 있었다. 받은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받으려고 했다. 나는 마음을 담은 편지를 원했고 엄마는 밥을, 아빠는 돈을 주셨다. 엄마 아빠의 글씨에 녹아든 정성과 진심 그리고 사랑을 느끼고 싶었다. 엄마는 마음을 밥에, 아빠는 돈에 담아 주었다는 것을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