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당탕탕 독일살이2
누군가 나에게 ‘독일어’라는 주제로 글을 쓰라고 한다면, 조금의 어려움도 없이 책 한 권의 양은 써내려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독일어는 아직까지도 나에게 엄청난 재미(30%)와 괴로움(70%)을 주는 끈질긴 존재다.
언어라는 것이 인간의 삶에서 얼마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을까? 새로운 지식을 습득할 때, 그 지식으로 시험을 칠 때, 내 생각을 표현할 때, 심지어 욕을 하거나 욕을 먹을 때도 “언어”는 늘 필수적인 수단이다. 수많은 것들의 기본이 되는 언어, 나는 약 6년 전, 그 기본도 없이 독일에 도착했다.
한국에서는 A2까지, 그러니까 기초 문법 정도 배우고 온 상태였다. 그렇지만 한국에서 책으로 배운 독일어와 현지인들의 독일어는 당연하게도 천차만별이었다. 말 속도, 악센트, 사용하는 어휘 등 내가 알던 것들과 너무나 달라 충격을 받았던 것이 독일의 독일어를 처음 접했을 때였다.
나의 첫 목표는 뚜렷했다. 독일어 C1 자격증. 잠깐 부언 설명을 하자면, 독일어 레벨에는 A1, A2, B1, B2, C1, C2 - 이렇게 총 6단계가 있는데 보통 대학교(Universität)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C1(시험 종류에 따라서 C2)이 요구된다. 어디에 내밀어도 “오~ 독일어 좀 하네”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레벨이다. 대학교 입학이라는 내 최종 목표에 독일어는 당연 꼭 통과해야 할 첫 시험이었다.
(변명 같지만) 독일에 와서 첫 3-4개월은 독일어를 따로 공부할 수 없을 정도로 바빴다. 비자와 보험은 한국에서 처리하고 왔던 터라 비교적 수월했지만 거주지 등록, 은행계좌, 집 구하기 등등 할 게 태산이었다. 더군다나 도착하자마자 첫 3개월은 인턴쉽(Praktikum)까지 병행하며 겨우겨우 독일에 적응해 나가느라 정신이 없었다. 독일인만 있던 회사에 혼자 말도 잘 못하는 아시아인으로 첫 사회생활을 하겠다고 나선 과거의 나에게 박수를 쳐주고 싶다. 비록 초반에는 시험을 위한 독일어를 공부하지 못했지만 회사 동료들과 같이 지내던 독일 가족 덕분에 어느 정도 독일어를 알아듣고 의사를 표현하는데 조금씩 익숙해졌다. 그래 봤자 대부분 못 알아듣고 알아들은 척 웃으면서 Ja(네) 하던 게 다였지만.
3개월간의 인턴쉽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어학공부에 돌입했다. 1년 안에 C1 어학증과 대학교 합격증을 내보이겠노라 부모님께 호언장담을 했던 나는 바보같이 12개월의 '공부할 시간'이 주어진 줄 알았다. 한국과 달리 뭐 하나 신청하거나 증명서를 받으려면 한 달은 기본적으로 기다려야 하는 독일의 아날로그식 프로세스를 몰랐던 것이다. 시험 결과가 나오기까지의 시간, 서류 공증, 대학교 지원 기간 등등을 고려하지 못했다. 뒤늦게 계산해보니 어학은 인턴 기간을 제외하고 7-8개월 안에 끝내야 했다.
애가 타기 시작했다. 최대한 빨리 어학원을 알아보고 레벨 테스트를 쳤는데, 웬걸, B2레벨이 나와버렸다. 내가 정식으로 끝내지도 못한 A2에서 두 단계나 높은 레벨이었다. 독일어에서 제일 중요하다는 B1레벨을 뛰어넘어 버리는 게 불안하긴 했지만 초조한 마음에 무작정 B2 반에 들어갔다. 귀는 조금 열렸대도 입은 꾹 닫혀있었던 내 독일어는 반에서 단연 꼴찌였다. 나처럼 독일 대학교 입학을 목표로 하는 다양한 국적의 반 친구들은 잘도 발표와 토론을 해나갔다. 반면에 나는 선생님의 말도, 친구들의 말도, 내가 하는 말까지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이 악물고 독일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한국 드라마, 예능, 노래를 다 끊어내고, 독일어 노래, 뉴스를 찾아 듣기 시작했다. 독독사전을 켜놓고 넷플릭스 미드를 독일어 더빙으로 보며 단어를 배워나갔고, 유튜브에 쳐서 나오는 독일어 영상들을 보고 들으면서 받아쓰기를 했다. 지금 읽어보면 순 엉터리지만 독일어로 일기도 쓰고, 독일어 말하기 연습을 하려고 혼자 주제를 정해 중엉중얼거리면서 길거리를 돌아다녔다.
처음으로 내가 하고 싶어서 시작한 공부였고 그래서 더 재밌게, 열심히 했다. 그렇게 스파르타식 공부를 하니 내 독일어는 B2코스가 끝날 즈음에는 토론도 문제없이 참여하고 자발적으로 발표도 하는 수준까지 올랐다. 안 들리던 것들이 들리고 못하던 말이 터지니 재미가 배로 불었다. B2반을 지나 C1, 그리고 시험 준비반을 거쳐 합격을 하기까지 총 6개월의 시간이 걸렸다.
몇 문단의 글로 줄여버렸지만 이 6개월은 눈에 띄게 쭉쭉 느는 독일어에 뿌듯함이 가득했음과 동시에 참 외롭기도 한 시간이었다. 시험에 합격하지 못하면 다시 한국에 돌아가야 한다는 압박감, 나 스스로에게 느껴질 한심함과 부끄러움이 나를 괴롭혔다. 어제는 분명 독일어가 늘었더 것 같았는데 오늘은 다시 쓰던 단어도 기억나지 않고 공부를 꾸준히 함에도 불구하고 실력이 퇴화하고 있는 게 아닌가 불안하기도 했다. 어학원-도서관-집을 오가면서 버스에 타면 옆자리 사람들 말에서 한 단어라도 더 배울까 귀를 기울이고, 한국어를 쓰면 안 될 것 같아 한국에 있는 부모님과 친구들에게 연락도 거의 하지 않았다. 당연 1년 내내 한국인 친구 한 명도 사귈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극단적인 방법을 통해 비교적 빠른 시간 안에 어학공부를 마칠 수 있었고 이 시간은 내가 지금까지 독일에서 살 수 있게 해 준 원동력이 되었다.
이렇게 독일어에 대해서는 더 이상 걱정이 없을 줄 알았지만... 이건 겨우 시작이었다. “나 이제 독일어 꽤 하는구나”하며 어깨가 마구 올라가고 있을 때 대학교에 입학을 하고 '내 독일어는 아무것도 아니구나'를 깨달아버린 것이다. 어학원에서 배우던 독일어는 현지 독일 친구들이 쓰는 독일어와 또 달랐다. 독일어가 모국어가 아닌 외국인 친구들과 대화하며 느끼던 편안함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평생을 독일어로 살아온 독일인들 사이에서 혼자만 1-2년 배운 독일어로 같은 수업을 듣고 발표를 하고 토론을 해야 했다. 거기다 강의에서 수백 개씩 나오는, 어디에도 한국어 번역을 찾을 수 없는 전공 용어들은 매일매일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그렇게 독일어와의 2차 전쟁이 시작되었다.
물론 지금도 애증의 독일어와의 n번째 전쟁은 진행 중이다. 특히나 일상에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 수준에 도달하고 나서는 독일어 공부에 게을러져 오히려 대학교에 다닐 때보다 독일어 실력이 줄어든 것 같기도 하다. 가끔 단어를 까먹어 독일어 공부의 시급함을 느끼다가도 독일어권이 아닌 국가에 갔다가 돌아와서 독일어에 둘러싸이면 안정감을 느낀다. 무엇보다 독일어가 독일 생활에 너무나도 큰 플러스 요소라는 것을 회사생활을 하면서 더 느끼고 있다. 현지 언어를 배우고 사용하는 것은 예의이기도 하지만, 사람들과 그들의 문화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이 너무나 매력적이다. 물론 많은 독일인들이 문제없이 영어로 소통이 가능하지만 그들의 모국어인 독일어로 대화를 하면 그 사람에 대한 또 다른 발견할 수 있다.
독일어를 완벽하게 해야지! 하는 욕심은 버린 지 오래다. 하지만 오늘 글을 쓰며 독일어의 장벽 때문에 온전히 내가 나 자신이 될 수 없었던 상황들이 떠올랐고 조금 마음이 아프기도 했다. 이렇게 다시 한번 공부의 필요성과 의지를 다잡는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기죽지 않고 늘 자신감을 가지는 것임을 알지만 아직까지도 어려운 것 같다. 자기 전에 독일어 단어 10개라도 외우고 자야겠다.
+독일어를 잘 못해서 일어난 일화들
사랑니를 뽑으러 치과에 가서 마취주사를 맞았다. 의사 선생님이 잇몸을 찌르며 Spüren Sie?(느껴지세요?) 하고 물었고 나는 알아듣지 못했지만 마취가 잘 되었다는 의미에서 일단 Ja(네)라고 대답을 했다. 의사는 주사를 다시 놨다. 그리고 다시 한번 의사가 같은 질문을 던졌지만 나는 긴장한 탓에 Nein(아니오)라고 해야 할 걸 또다시 Ja를 해버렸고 마취주사는 또 내 잇몸을 찔렀다.
당연히 초등학교부터 배워온 영어가 독일어보다 훨씬 편하고 나은 상황이었지만 최대한 독일어를 쓰려고 영어를 아예 못하는 척했다. 바보가 된 거 같았다.
제일 무서운 건 전화였다. 실제로 보고 말하면 표정이나 바디랭귀지로 짐작할 수 있는 단어들이 많지만 전화는 정말 듣고 말하는 독일어밖에 없으니 늘 두려웠다. 한 번은 택배회사에 전화할 일이 있어 스크립트를 작성하고 덜덜 떨며 전화를 했는데 결국 원하는 걸 말하지도, 상담원 말을 알아듣지도 못했다. 상담원이 몇 번이나 천천히 반복해서 말해주다가 답답해서 화가 났는지 다음에 옆에 독일어 잘하는 친구가 있을 때 다시 걸으라고 끊어버렸다. 그 이후 전화가 더 무서워졌다.
독일어를 못하니 비꼬아서 말하는 방법도 당연히 몰랐고, 상대가 비꼬아 말해도 역시 알아챌 수 없었다. 그래서 늘 표면적인 의미 그대로 받아들이고 웃으면서 대답했는데 날 예전에 알던 사람들은 내가 참 바보같이 착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