냄비에 물을 받는다. 조금 많은가? 항상 드는 의구심이지만 계량컵 따위를 사용할 생각은 전혀 없다. 레인지에 올리고 불을 켠다. 라면을 끓일 생각이다.
누군가 짜장면이 맛이 없어져야 어른이 된 거라고 하던데, 라면도 같은 맥락이 아닐까 싶다. 짜장면이나 라면이 맛이 없어지면 비로소 철이 든 어른이 되었다는 의미일 수도 있고, 반대로 이제는 늙어버려 입맛이 변한 꼰대가 되었다는 것일 수도 있는 이중적인 의미일 텐데, 이러나저러나 아직은 짜장면도 맛있고 라면도 맛있으니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물이 끓기 시작한다. 서둘러 대파를 숭숭 썬다. 라면과 수프를 넣고 큼지막하게 썬 대파도 함께 냄비에 투하한다. 덜 익어 서걱거리는 파가 아닌 물컹하게 푹 익어서 단맛이 나는 파를 곁들인 것이 오늘의 라면이다.
인스턴트식품이 다 그렇듯 누구나 할 수 있는 간편한 조리법으로, 누가 어떻게 끓여도 비슷한 맛이 나는 음식으로 개발된 것이 라면일 텐데, 지금의 세상엔 저마다의 개성과 맛을 장착한 다양한 종류의 라면이 있고, 조리법 또한 다양하기 그지없다. 그리고 라면의 맛은 매우 정직하게 무엇과 함께 하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맛을 낸다.
파나 양파를 넣는 건 전통적인 조리법이고, 김치를 살짝 곁들이면 김치찌개 느낌의 라면이, 황태와 함께하면 시원한 해장국이 되기도 한다. 달걀을 넣어 끓일 땐 이걸 터뜨릴 건지 풀지 않고 그대로 익힐 건지가 작은 고민거리가 되기도 하고, 아삭한 식감을 원할 땐 조리 끝 무렵에 숙주나물이나 콩나물을 넣기도 한다.
고춧가루를 식용유에 살짝 볶은 다음 조리하면 희미하지만, 짬뽕의 향기가 나고, 전복이라도 한 마리 투하하면 럭셔리한 느낌이, 그리고 치즈를 한 장 던져 넣으면 약간은 느끼한 그러나 풍성한 맛의 라면이 된다.
쉽지만 맛있는 요리가 라면이다.
뜬금없이 맛있는 카레 조리법이 떠오른다. 카레를 맛있게 만드는 방법은 양파를 오래도록 볶는 것인데 – 요리를 하시는 분들은 이걸 캐러멜라이징이라고 하던가? - 이렇게 하면 카레에 양파의 은은한 단맛이 더해져 한층 풍성한 맛이 나게 된다. 쓸데없는 창의력인지 모르겠으나 다음에 라면을 끓일 때 이걸 한번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든 거다. 갑자기
딱딱한 라면의 면발이 뜨거운 물을 견디지 못하고 말랑말랑하게 부드러워지더니 드디어 촉촉하게 잘 익은 면발이 되었다. 잠시 냄비째 먹을까? 아니면 그릇에 옮겨 담을까? 고민하다 그릇에 담아서 먹기로 한다. 왜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 뭐 그런 말이 있지 않은가.
라면을 담은 그릇 한쪽에 식은 밥 한 덩이를 살포시 담그고는 라면 한 젓가락을 후루룩 빨아들인다. 맛있다. 심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