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음을 인정하는 것, 지혜로움의 시작?

by 김종열

목욕탕이다. 휴게실을 찾는다. 평소엔 늙지도 않는 바쁜 성격 때문인지, 갑갑함을 싫어하는 성격 탓인지 온수에 몸을 담갔다가 샤워만 하고 나서는 편인데, 오늘은 찌뿌둥한 몸을 달래려고 사우나에서 땀을 흘린 후 휴게실에서 몸을 식히려는 것이다.


돌바닥의 휴게실에는 돌베개가 나란히 놓여있다. 적당한 곳을 찾아 엉덩이를 내려놓고 몸을 누인다. 가늠을 잘 못했는지 머리 끝부분이 베개에 닿는다. 갸우뚱하며 몸을 베개 쪽으로 당겨 올려 자리를 잡는다. 그리곤 아무 생각 없이 까무룩 잠이 든다.


며칠이 흘렀다. 또 목욕탕 휴게실이다. 돌베개와의 거리를 눈으로 잰 다음 몸을 누인다. 어라! 또 머리 끝부분이 베개에 닿는다. ‘왜 이러지?’ 하면서 몸을 당겨 올려 베개에 맞춘다. 그러다 퍼뜩 ‘아! 키가 줄었지’라는 생각이 떠오른다. 몸은 늙음을 인정하고 변해 있는데, 마음은 그 변함을 인정하지 못해서 생기는 그런 일 중의 하나라는 생각과 함께.


나이가 들면 키가 줄어든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설마 그러랴 싶었는데, 설마 그랬다. 공식적(?)으로 170cm(169.5cm를 사사오입한 것인데, 수학에서도 쓰이고, 또 사사오입 개헌까지 한 나라의 국민인데 뭐…)이든 키가 어느샌가 169cm(이것도 당연히 168.5cm를 사사오입한 거)가 되어 버렸으니.


인정해야 하는데 인정하기 싫었던가 보다. 어쩌다 누군가가 키 크기를 물으면, 169cm라고 대답하지 않고 옛날에는 170cm이었는데 이제는 줄어서 169cm라고 답하는 걸 보면 말이다. 하긴 누가 늙음을 순순히 인정하겠는가.


늙어서 좋은 건 별로 없다. 아니, 거의 없다.

굵던 머리카락은 얇아지고, 세고, 빠져서 듬성듬성해지며, 얼굴엔 주름살과 잡티가 자리 잡고, 눈은 뻑뻑해지면서 침침해진다. 굵어야 할 팔과 다리는 얇아지고, 나와야 할 가슴과 엉덩이는 쪼그라들며, 나오지 말아야 할 배는 주책없이 나온다. 누가 부른 것도 아닌데.

균형감각과 순발력, 근력, 스피드 등의 운동신경도 떨어지고, 이해력, 기억력, 습득력, 암기력 등의 지적 능력도 후퇴하며, 대신 자기 확신은 전진을 거듭하여 ×고집은 엄청나게 세진다.

세상일이라는 게 좋다고 다 좋은 것만 있는 게 아니듯이, 나쁘다고 다 나쁜 것만 있는 것도 아니다. 늙어서 좋은 건 없지만 그래도 좋은 게 있긴 있다. 살아온 세월만큼 쌓이는 경험과 경륜이 그것이다.

경험과 경륜은 어떤 일이 닥쳤을 때 비교적 유연하게 그 일을 해결할 수 있게 하는 지혜로움이며, 해서는 안 될 일과 하면 좋은 일을 예측할 수 있는 혜안이며, 합리적이고 올바른 의사결정을 하게 하는 지혜이다.


흘러간 세월과 함께 흘러가 버린 젊은 신체와 운동신경과 지적 능력을 애달파하고 그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보단, 흘러간 시간이 내게 준, 경험과 경륜을 받아들이는 것. 그 게 늙음을 인정하는 지혜로움의 시작이 아닐까?


돌베개에서 몸을 일으킨다. 다음에는 저 돌베개에 머리를 정확히 맞출 수 있으려나? 키의 줄어듦을, 그 늙음을 인정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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