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욕탕이다. 휴게실을 찾는다. 평소엔 늙지도 않는 바쁜 성격 때문인지, 갑갑함을 싫어하는 성격 탓인지 온수에 몸을 담갔다가 샤워만 하고 나서는 편인데, 오늘은 찌뿌둥한 몸을 달래려고 사우나에서 땀을 흘린 후 휴게실에서 몸을 식히려는 것이다.
돌바닥의 휴게실에는 돌베개가 나란히 놓여있다. 적당한 곳을 찾아 엉덩이를 내려놓고 몸을 누인다. 가늠을 잘 못했는지 머리 끝부분이 베개에 닿는다. 갸우뚱하며 몸을 베개 쪽으로 당겨 올려 자리를 잡는다. 그리곤 아무 생각 없이 까무룩 잠이 든다.
며칠이 흘렀다. 또 목욕탕 휴게실이다. 돌베개와의 거리를 눈으로 잰 다음 몸을 누인다. 어라! 또 머리 끝부분이 베개에 닿는다. ‘왜 이러지?’ 하면서 몸을 당겨 올려 베개에 맞춘다. 그러다 퍼뜩 ‘아! 키가 줄었지’라는 생각이 떠오른다. 몸은 늙음을 인정하고 변해 있는데, 마음은 그 변함을 인정하지 못해서 생기는 그런 일 중의 하나라는 생각과 함께.
나이가 들면 키가 줄어든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설마 그러랴 싶었는데, 설마 그랬다. 공식적(?)으로 170cm(169.5cm를 사사오입한 것인데, 수학에서도 쓰이고, 또 사사오입 개헌까지 한 나라의 국민인데 뭐…)이든 키가 어느샌가 169cm(이것도 당연히 168.5cm를 사사오입한 거)가 되어 버렸으니.
인정해야 하는데 인정하기 싫었던가 보다. 어쩌다 누군가가 키 크기를 물으면, 169cm라고 대답하지 않고 옛날에는 170cm이었는데 이제는 줄어서 169cm라고 답하는 걸 보면 말이다. 하긴 누가 늙음을 순순히 인정하겠는가.
늙어서 좋은 건 별로 없다. 아니, 거의 없다.
굵던 머리카락은 얇아지고, 세고, 빠져서 듬성듬성해지며, 얼굴엔 주름살과 잡티가 자리 잡고, 눈은 뻑뻑해지면서 침침해진다. 굵어야 할 팔과 다리는 얇아지고, 나와야 할 가슴과 엉덩이는 쪼그라들며, 나오지 말아야 할 배는 주책없이 나온다. 누가 부른 것도 아닌데.
균형감각과 순발력, 근력, 스피드 등의 운동신경도 떨어지고, 이해력, 기억력, 습득력, 암기력 등의 지적 능력도 후퇴하며, 대신 자기 확신은 전진을 거듭하여 ×고집은 엄청나게 세진다.
세상일이라는 게 좋다고 다 좋은 것만 있는 게 아니듯이, 나쁘다고 다 나쁜 것만 있는 것도 아니다. 늙어서 좋은 건 없지만 그래도 좋은 게 있긴 있다. 살아온 세월만큼 쌓이는 경험과 경륜이 그것이다.
경험과 경륜은 어떤 일이 닥쳤을 때 비교적 유연하게 그 일을 해결할 수 있게 하는 지혜로움이며, 해서는 안 될 일과 하면 좋은 일을 예측할 수 있는 혜안이며, 합리적이고 올바른 의사결정을 하게 하는 지혜이다.
흘러간 세월과 함께 흘러가 버린 젊은 신체와 운동신경과 지적 능력을 애달파하고 그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보단, 흘러간 시간이 내게 준, 경험과 경륜을 받아들이는 것. 그 게 늙음을 인정하는 지혜로움의 시작이 아닐까?
돌베개에서 몸을 일으킨다. 다음에는 저 돌베개에 머리를 정확히 맞출 수 있으려나? 키의 줄어듦을, 그 늙음을 인정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