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설거지는 안 되는 거?

by 김종열

설거지를 언제부터 하게 되었는지 가물가물한데, 기억으로는 아내가 전업주부이기를 포기한 때부터 일 것 같으니 내 설거지 경력도 만만치는 않는 것 같다.


처음에는 뭐 그렇게 좋은 마음으로 한 것 같지는 않다. 집안일을 하던 사람이 직장생활도 병행하게 되니까 시간이 부족해 보이기도 했고, 가사노동 분담도 필요해 보이는 데다, 무엇보다 큰 이유는 살려면(?) 해야 될 일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깨끗한 거 좋아하고 정리된 것 좋아하는 경미한 결벽증 증상을 가지 나로서는 밥 먹고 난 후의 지저분한 식기류들을 만진다는 게 유쾌한 일일 수는 없었다. 그러나 누군가가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라는 명언을 남겼는데, 다른 모든 일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으나 설거지는 명언대로 - 물론 100%는 당연히 아니지만 - 즐기기로 했는데, 이건 개념만 거꾸로 하면 되는 일이었다.

지저분한 식기들이 내 손을 거쳐서는 깨끗해지고, 정리가 되고, 재사용 가능한 상태로 환원된다는 거. 그렇게 설거지는 지속 가능한 일이 되어 버렸다.


설거지라는 게 수세미를 사용하여 그릇들을 깨끗이 닦아내고 헹궈서 건조기에 쌓아 올리는 행위를 말하는데, 여기에도 정리정돈의 미학이 있다. 그냥 질서 없이 집히는 대로 쌓아 올리면 큰 그릇 작은 그릇의 아귀가 맞지 않아 그냥 수북해 보이지만, 접시는 접시대로 착착 세우고, 작은 그릇을 먼저 놓은 뒤 그 위에 큰 그릇을 포개 놓으면, 건조기의 공간 활용도가 엄청 높아지면서 보기에도 깔끔해서 흐뭇해진다.


얼마 전에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를 다시 한번 읽었는데, 그 결과 미국 서부에 사는 사람들이 총만 잘 쏘는 사람들이 아니고 삶의 터전 마련을 위해 엄청나게 고생하셨던 사람들이라는 것과, 생뚱맞지만 설거지는 밀가루로 하는 게 지극히 옳다는 걸 알게 되었다.


‘분노의 포도’는 삶의 터전을 찾아가는 사람들의 여정을 그린 이야기인데, 야영을 하면서 절인 돼지고기로 식사를 한 후 밀가루로 식기를 닦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이 소설의 시대적 배경이 대공황 때니까 밀가루는 미국 조상들의 지혜가 담긴 설거지 방법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 집도 오래전부터 이웃 아주머니의 권유로 세제 대신 밀가루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 소설이 밀가루가 옳은 방법이라는 걸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었다고 할까?


설거지 중 이런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내 급한 마음, 불쑥불쑥 쏟아 오르는 신경질, 시기, 질투하는 마음, 쓸데없는 욕심이나 분노, 이런 마음들을 설거지하듯이 하얀 밀가루로 씻어서 하얗게 만들 수 있다면 하는·…


마치 토끼 간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