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투에 담아 주는 건 밀가루고, 봉다리에 담아 주는 건 밀가리, 밀가루로 만든 건 국수고, 밀가리로 만든 건 국시’ 이런 아재 개그가 유행하던 때가 있었다. 뜬금없이 왜? 국수 이야기를 하려니 떠오르는 농담인데, 어쨌거나 국시라고 부르던 때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좋아하는 음식이 국수이다.
양식이 귀해서였을까? 밥 대신 국수로 끼니를 때울 때가 많았다. 지금처럼 부드럽지도 하얗지도 않은 살짝 검은빛의 거친 국수에, 총총 썬 김치 거나 아니면 호박 나물 하나인 빈약한 고명을 얹고, 멸치 육수로 마무리한 국수가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가끔은 칼국수가 둥근 밥상에 오르기도 했는데 이것도 역시 좋았다. 지금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는, 같은 밀가루 반죽으로 만든 음식인데도 수제비는 싫은데 칼국수는 좋았다는 것.
수제비는 밀가루 반죽을 손으로 뚝뚝 떼어 넣는데 바쁜 손길의 두껍고 뭉툭함이 싫었을까? 육수를 머금은 칼국수의 촉촉하고 가는 면발이 좋았을까? 아니면 차지게 뭉쳐진 밀가루 반죽을 밀대로 밀어 엷게 펼치고 잘게 썰어내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 칼국수의 정성스러움이 좋았을까? 이런저런 이유 없이 그냥 길쭉한 것이 좋았던 것일까? 어찌 됐든 지금이야 수제비도 좋고 칼국수도 좋으니 뭐!
귀했고, 귀해서 별미였던 라면은 온전히 라면으로만 즐길 수 있는 음식이 아니었다. 그래서 라면과 국수를 반반으로 넣고 김치로 간을 맞추어 끓여낸 것을 먹었는데, 매번 라면 면발을 먼저 골라 먹긴 했으나 그렇게 라면에 묻어가는 국수도 싫지 않았다. 또 양식을 늘일 목적으로 겨우내 밥상에 올라오던 김치 국밥은 지겹게도 싫은 음식이었는데, 그 김치 국밥에 고명처럼 들어 있던 국수는 싫지 않았으니, 국수를 어지간히도 좋아한 것 같긴 하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라는 속담이 있다. 한번 가진 습관은 여간해서 바뀌지 않는다는 뜻일 텐데, 입맛도 마찬가지여서 여간해서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한때는 꾸준히도 국수 맛집을 탐했고, 지금도 국수라고 하면 언제나 OK이다.
인근 도시로 출퇴근할 때가 있었다. 큰 강을 가로지르는 긴 다리를 건너 다녀야 했는데, 그 다리 입구에 태극기가 휘날리는 허름한 천막집이 하나 있었다. 그리고 입간판이 하나 세워져 있었는데 거기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국수 영업 중.
진작에 한번 가 봐야지 하고 생각했지만, 아침엔 출근길이 바빠서 저녁엔 퇴근에 눈이 멀어 정작 지나다닐 때는 가보지 못하고, 뒷날 국수를 좋아하는 몇몇 지인을 섭외하여 그곳을 찾았다. 주문한 국수를 먹으려고 하니 간을 한번 보고 양념장을 넣으란다. 육수에 간이 되어 있다는 얘기다. 약간의 양념장으로 간을 맞추고 한 젓가락 후루룩 먹는다. 맛있다. 뚝딱, 한 그릇을 비운다. 일행 모두.
맛있는 마음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누군가 그 국숫집 인근에 잘하는 국숫집이 또 있단다. 그렇다면 가 봐야지.
며칠 후 잘한다는 국숫집을 찾아간다. 이 집도 천막집이다. 국수를 잘하는 집은 모두 천막인가?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안으로 들어가니 자리가 꽉 찼다.
기대감으로 주문한 국수를 맞이한다. 간간하게 간이 밴 진한 육수와 탱글탱글 쫄깃쫄깃한 면발이 일품이다. 육수의 간이 국수의 맛을 좌우하는 건가? 맛있어 보이는 양념장의 간보다 보이지 않는 육수의 간이 더 깊은 맛을 내는 듯하다. 겉멋보다 내면의 멋이 더 아름답듯이, 드러내는 친밀감보다 속 정이 더 깊듯이.
아! 그리고 이 집은 비빔국수도 맛이 있다. 공부 잘하는 학생이 영어 수학 가리지 않듯, 연주에 뛰어난 사람이 모든 악기를 잘 다루듯, 운동 잘하는 사람이 종목에 구애받지 않듯이, 그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