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by 김종열

어찌어찌하다가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책을 읽고 있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책이 있나? 반문할 수도 있지만,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옷이 있듯이 나이에 어울리지 않은 그런 책이 있다. 동화책을 어른이 읽을 수는 없지 않은가? 아니지 어쩌면 동화가 어른의 영혼을 정화해 줄 수도 있는데… 이랬건 저랬건

읽고 있는 책은 실연의 상처가 너무 깊어 몸조차 제대로 가눌 수 없는 하루하루를 버텨나가는 젊은이의 얘기다. 젊은 날의 사랑이 저토록 아픈 것이었나? 싶다가 예전에 즐겨 듣든 노래를 떠올린다.


‘사랑이 날 또 아프게 해요. 사랑이 날 또 울게 하네요. 다시는 못쓰게 된 내 가슴은 이렇게 아픈데 사랑은 꿈을 깨듯 허무하네요. 이렇게 또 하루가 지나가네요.’ 부서진 사랑 때문에 아픈 날들을 견디어내는 슬픈 노래이다.


사랑에 취해 꿈만 같았던 날이 길면 길수록, 그 사랑이 깊으면 깊을수록 실연의 아픔은 더했으리라. 그러고 보면 젊은 날의 하루도 마냥 좋기만 한 게 아니었던 것 같다. 이런 하루도 있고 저런 하루도 있었으니.

또 다른 하루도 있다. 교과서에 등재되었던가? 아니면 자주 언급되었던가? 아주 유명한 ‘운수 좋은 날’의 주인공 인력거꾼 김 첨지의 하루. 오늘은 일을 나가지 말라는 아픈 아내를 두고 길거리로 나선 김 첨지에게 손님이 끊이지 않는 행운이 계속된다. 그런 행운에도 가시질 않는 불길함 속에 아내에게 줄 설렁탕을 사 들고 집으로 돌아오지만, 아내는 이미 죽어있었다는 내용. 운수 좋은 날이었지만 지독히 운수 나쁜 그런 하루를 담은 얘기다.


‘운수 오진 날’이라는 드라마도 있다. 택시 기사인 주인공이 마칠 시간에 장거리 손님을 태우는 행운을 맞이하지만, 그 손님이 지독한 살인마라는 설정의 스릴러이다. 이 또한 운수가 오졌지만 이내 악몽 같은 하루가 되어 버리는 얘기이다. 살다 보면 운수 좋은 하루도 있고 운수 나쁜 하루도 있다. 그런가 하면

지극히 평범한 하루도 있다. 우리 동네에 ‘오늘의 하루’라는 강아지 간식 집이 있다. 오늘이라는 이름의 하루를 뜻하기도 하고, 이 집 반려견 이름이 ‘하루’여서 붙인 중의적인 가게명이라 짐작되는데, 어찌 됐건 이 집을 볼 때마다 매우 편안하다는 것이다. 붐비지 않아서 편안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해서인지 항상 밝은 주인도 편안하고, 강아지 간식을 고르는 고객도 편안하고, ‘오늘’도 편안한 느낌이고 ‘하루’도 편안한 느낌이다. 너무 평범해서 편안한 하루처럼 말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인생은 길기도 길어서 수많은 하루가 주어진다. 꿈같이 행복한 하루, 몸도 가눌 수 없는 고통스러운 하루, 운수 좋은 하루, 운수 나쁜 하루, 그냥 그런 평범한 하루, 바라던 일이 이루어지는 하루, 기다리고 기다렸던 하루, 여행을 떠나는 하루, 누군가를 만나는 하루, 혼자 보내는 하루 등.

삶이란 이런저런 색깔의 하루로 채워지는 그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하루를 잘 보내는 건 인생을 잘 그려가는 과정일 것이다. 그러니 어떤 하루든 헛되지 않게, 알차게 보내야 하지 않겠나? 하루를 백일처럼 그렇게.


알프레드 시슬리-9월의 아침.png 알프레드 시슬리-9월의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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