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by 김종열

살다 보면 짙게 기억에 남는 일들이 있다. 대개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나, 뭔가를 잘해서 자랑스러웠거나, 좋았던 일이거나, 반대로 부끄러운 실수를 했거나, 나빴던 일들이 머리 한편에 기억이라는 방에 자리를 잡고 떠나질 않는 것이다. 그런데 매우 사소한, 사소해도 너무 사소한 일 하나가 기억이라는 방에 떡하니 자리잡고 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어쩌면 당황스럽게 말이다.

직장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이니 꽤 오래전의 일이다. 일주일 내내 늦은 퇴근으로 지친 몸에게 보상하듯 아무것도 하지 않고 뒹굴뒹굴하고 있던 휴일의 저녁 무렵이었다. 몇 살 연배인 직장 동료에게서 전화가 걸려 온다. 무슨 일이 있나? 하며 통화를 하는데 목적어가 없다. 지금 순간이 너무 좋아서 그냥 했단다.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 그런 느낌으로 어버버 응대를 하고 통화를 마쳤다. 그리곤 잠시 갸웃했다. 그렇게 그 사소한 일이 기억의 방에 똬리를 틀었다.


사소함과 특별함의 기억과 함께 시간이 흘러 지금이라는 시간을 맞이한다. 어느덧 인생의 선배보다 후배가 많은 나이가 되었다. 어느 날 잠자리에 들려는데 전화가 울린다. 아직 현역으로 근무하는 직장 후배이다. 소주 한잔하는 자리인데 그냥 생각이 나서 연락했단다. 이제는 당황하지 않고 목적어가 없는 통화를 원만하게 마무리한다. 기억해줘서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그냥’을 받아들일 줄 아는 나이가 된 것일까? ‘그냥’의 소중함을 알게 된 것일까?


그러고 보면 ‘그냥’만큼 힘센 것도 없을듯하다. 왜 그 사람이 좋아? 그냥. 왜 그 노래가 좋아? 그냥. 왜 그랬어? 그냥. 왜 왔어? 그냥. 그냥 좋은 사람이 내겐 가장 좋은 사람일 테고, 그냥 좋은 노래가 내겐 가장 좋은 노래이고, 그냥 습관처럼 하는 일이 내겐 가장 소중한 일일 테고, 그냥 발길이 닿는 곳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일 테니 말이다. 그래서


‘그냥’을 검색해본다. ‘아무런 대가나 조건 또는 의미 따위가 없이’라는 부사란다. 그렇게 보면 ‘그냥’은 참 심심하고 의미 없는 행동인 것 같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자. 그냥 밥 한번 먹자고, 그냥 술 한잔하자고, 그냥 차 한잔하자고, 그냥 운동 한번 하자고, 그냥 얼굴 한번 보자고 연락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그냥’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다 편한 사람들이다. 편한 옷을 입고 만날 수 있는 사람, 다리를 쭉 뻗고 하품하는 편한 몸짓을 할 수 있는 사람. 좋은 게 같이 좋고, 싫은 게 같이 싫은 사람. 경제적 이익이나 목적 달성에 필요한 사람이 아니라 기쁘거나 슬픔을 함께하는 사람. 슬그머니 멀어져 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끝까지 곁에 있을 사람. 그러니


‘그냥’을 우습게 보지 말자. 평범한 일상만큼 소중한 게 없듯이 이 편한 ‘그냥’만큼 소중한 것도 없을 터이니.


칸딘스키-스카이 블루.jpg 칸딘스키-스카이 블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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