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살 앓다

by 김종열

살면서 가장 혹독한 몸살을 앓았다. 몇 년에 한 번씩은 몸살을 앓았을 텐데 가장 혹독하다는 느낌이 드는 건 최근의 일이라 기억이 짙어서일까? 아닌 것 같다. 이번에는 장염을 동반한 몸살이었으니.


감기 기운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무리해서 몸이 피곤한 것도 아니었다. 반가운 사람들과 재미있게 저녁 시간을 보내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새벽 무렵에 온몸이 맞은 듯한 근육통이 온 거다. 서둘러 병원을 찾아 처치하였더니 오후엔 살만해진다. 피치 못할 일정이 있어 그날 저녁에 긴가민가하면서 다시 집을 나선 게 화근이었을까? 무려 나흘 동안 꼼짝하지 못하고 몸살의 기에 눌려 버렸다.


듣는 둥 마는 둥 라디오를 켜놓고 이불 속에서 '자다 깨다'를 반복한다. 그러다 문득 헛웃음이 나는 거다. 백수가 과로사한다더니 뭘 했다고 몸살인가 싶어서 말이다. 그러고 보면 참으로 알뜰히도 시간을 보내긴 했다. 새벽부터 잠자리에 들 때까지 단 한 순간도 허투루 흘려보낸 시간은 없었으니. 몸살이 나으면 조금은 헐렁하게 시간을 대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아픈 상태의 시간이 길어진다. 하루가 이틀이 되고 사흘이 되고 나흘에 접어드니, 생전의 어머니가 자주 하시던 ‘당하면 못 당할 일 없다.’라는 말이 슬그머니 떠오른다. 이렇게 긴 시간을 누워서 보낼 수 있다는 게 신기하게 느껴져서 말이다. 이왕에 당한 일 긍정적으로 생각하자고 마음먹는다. 누워있는 시간만큼 누적된 피로와 몸속에 쌓인 노폐물이 흐물흐물 녹아버릴 거라고 굳세게 믿어버리면서.


예고 없이 찾아온 몸살은 모든 일상을 정지시켜 버린다. 읽기, 쓰기, 운동하기, 산책하기, 음악 듣기, 사람 만나기, 심지어 먹기, 배변하기까지 흩트려 버렸다. 아픔에 약해져 버린 마음 때문일까. 이런 생각이 뾰족이 머리를 내민다. 언젠가 맞이할 죽음도 예고 없이 찾아와 모든 일상을 한순간에 내려놓게 할 것이라는 그런 생각. 아프니 드는 쓸데없는 생각인가? 어쨌든


이 몸살을 툭툭 털고 일어나서 다시 일상을 맞이하면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매일을 마지막인 듯 정성스럽게, 내 삶을 투명하고 간결하게, 떠난 자리가 깔끔하게 살아야지 한다. 이건 몸살이 주는 긍정적인 효과인 건가. 이러나저러나, 세월이 약이라더니 시간이 아픔을 조금씩 녹여나간다. 내일이면 ‘읏차’ 하며 일어나겠지.

몸만 몸살을 앓을까. 그럴 리가 없다. 마음도 몸살을 앓는다. 어린 마음을 아프게 휘적였던 사랑의 몸살, 정의롭지 않아 보이는 세상에 대한 젊은 울분, 뜻대로 되지 않는 삶에 대한 불편한 심경, 성취에 대한 갈구와 실패로 인해 아픈 마음의 몸살 등. 어쩌면 그런 마음의 몸살이 모여 지금의 내가 된 것 아닐까?


인생의 몸살이 나를 키우고 성숙하게 했듯이 이 몸살이 어쩌면 더 건강한 나를 만들지도 모른다. 아파야 면역이 생긴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것 같기도 하니…. 그렇게 생각하자. 어차피 아파 버린 것 마음이라도 편하게.


구스타프 클림트-물뱀.jpg 구스타프 클림트-물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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