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애가 우리 집에 왔다 또. 싫다. 할배, 할매의 시선은 벌써 그 애에게로 향해 있고, 입 꼬리는 귀 근처에 가있다. 저렇게도 좋은가?
저 사랑이 담긴 시선과 웃음은 평소엔 내 것이었고, 바램대로 하자면 내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저 자그마한 애가 아지야의 그녀 품에 안겨 우리 집에 들어서는 순간 내 것이 내 것이 아닌 게 되어버리니 내가 저 애를 좋아할 수가 있겠나?
아지야는 엄마의 오빠이다. 엄마가 나를 안고 할배, 할매의 집으로 왔을 때 나를 환영해준 사람이었고, 나를 좋아하지만 그 방식은 좀 촌스럽다. 아니 많이 촌스럽다.
절대 “두유야”라고 부르는 법이 없다. “야” “인마” 등으로 호칭하고 부드러운 손길보다는 거친 손길로 나를 대한다. 그렇지만 나를 좋아하는 건 확실하다. 왜 결혼하기 전의 남자들이 가진 약간은 거칠고, 약간은 서툰 애정표현 있지 않은가? 그런 거다.
그런 아지야가 어느 날 예쁘장하고 다소곳한 그녀를 데리고 우리 집에 왔다. 대놓고 보지 못하고 슬금슬금 관찰하는 할배, 할매와는 달리 나는 턱을 괴고 엎드린 채 대놓고 관찰한다.
‘아니요.’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등의 언어들과, 입을 가리고 웃는 등 예의라고 불리는 가식적인 - 평소와는 다르다는 의미로 받아들였으면 한다. 나쁜 의도가 아니니 - 행동으로 시간을 보내더니, 그 후 몇 차례 우리 집에 드나들었다. 그리고는 어느 날 그녀는 아지야의 그녀가 되었다.
아지야의 그녀는 나를 좋아하려고 애를 쓴다. 이름을 불러주고 쓰다듬기를 시도한다. 그러나 내가 누군가? 의리, 순정 뭐 그런 걸 지키는 강아지 아닌가. 내 마음에 원픽인 엄마가 있고, 할배, 할매가 있는데 섣불리 마음을 주지 않는다. 내게 그녀는 어디까지나 아지야의 그녀일 뿐이다.
그런 그녀의 배가 슬슬 불러오더니(밥을 많이 먹은 거?), 시간이 지날수록 많이 불러오더니, 어느 날 홀쭉해진 배와 불렀을 때의 부피만 한 ♬웬 아이를 떡 안고서 나타나게 되었던 거야♬.
그때, 무기들아 잘 있으라고 했어야 했을까?
* 개 세이(개+에세이, 개+say)는 반려견의 관점으로 쓴 에세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