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몇 년의 몇을 잠시 더듬어 보다가 그냥 포기하기로 했습니다. 아무래도 저의 뇌는 어떤 정보에 숫자가 섞여있으면 그 숫자에 대해선 아예 패싱하는 기능이 장착되어 있나 봅니다. 그래도 뭐 몇 년도보단 왜 그것을 하게 되었느냐가 더 중요한 정보니까 나름 특화된 프로세스라고 할 수도 있겠죠.
아닌 게 아니라 제게 있어 '파마'는 상당히 큰 용기가 필요한 행위였습니다. 무엇보다 머리에 뭘 둘러쓰고 기다리는 그 시간이 늘 장애가 되었습니다. 그 무안함과 어정쩡함을 상쇄시킬 외향적 뻔뻔함이나 아니면 그 보다 더 큰 내면의 당위성이 있었더라면 좀 더 이전이라도 가능했을까요?
그런던 와중 어느 날 동생이 파마를 하고 나타났습니다. 동생의 파마는 그야말로 꽤 근사해 보였습니다.
"형도 한번 해봐. 괜찮아"
아내도 덩달아 권했습니다. 동생처럼 잘 어울릴 것 같다고 용기를 북돋아 주었습니다.
그렇게 제 인생에서 가장 잘 한 일중 하나로 꼽히는 '파마'가 실행되었습니다.
처음 파마약을 뿌리고 기다릴 때는 조마조마한 마음 반, 은근히 기대하는 마음 반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론 생각보다 어울리지 않으면 바로 머리를 커트해야 하나? 여기선 너무 미안하니까 곧바로 다른 미용실로 가야 하나? 하는 등, 별 쓸데없는 잡념들이 한가득이었죠.
그리고 마침내 말았던 머리가 풀렸을 때, 거울을 볼 새도 없이 우선 샴푸 하러 자리를 옮겼다 비로소 다시 거울 앞에 앉았을 때, 저는 묘한 웃음이 터지려던 것을 참느라 꽤 애를 먹었습니다.
생각보다 괜찮은 것 같으면서도 또 어딘지 언발란스한 머리 상태를 뭐라 표현할 길이 없었습니다.
'햐, 이건 머'
그런데 낯선 모습에서 저는 묘한 쾌감과 자신감이 솟는 것을 느꼈습니다. 짐 캐리가 우연히 발견한 '마스크'를 처음 썼을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요?
(짐캐리 마스크)
네. 전 이걸 '파마의 힘'이라 부르기로 하였습니다.
남자건 여자건 유난히 스타일이 잘 나오는 날이 있죠. 그럴 땐 정우성이나 김태희와도 비벼볼 만하겠다는 근자감이 샘솟습니다. 이 스타일이 고대로 몇 년이고 세팅이 유지된다면 얼마나 좋을까란 상상도 해봅니다.
저는 예전부터 직모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었습니다. 뒤통수가 납작한 편이라 자연적으로 위에서 내려봤을 때 두상이 삼각형 구조를 이루는데, 그 때문에 항상 옆머리가 뻗치거나 뜨는 현상이 심했습니다. 특히 이 현상은 방금 머리를 커트했을 때 제일 심했는데요. 그래서 저는 이발기 날을 짧게 하고 옆머리를 쳐 올리는 것을 대단히 싫어했습니다. 늘 가위로 커트하는 걸 고집했었죠. 그런데 파마를 하고 나니까 옆머리가 착 머리에 붙는 겁니다. 따로 스타일링도 필요 없었습니다. 윗머리는 스타일리시하게 웨이브 지는 반면, 옆머리는 착 붙어 샤프함을 더해주었습니다. 뭔가 더 부유한 사람이 된 것 같았고, 더 똑똑해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외모가 주는 만족감이 이런 정도인가? 싶었습니다.
이 투머치(too much)한 에너지는 대체 어디로부터 온 무엇일까요?
저는 이것이 어떤 '개선'이라기 보단 아예 '재탄생'이란 생각이들었습니다.
실제 파마의 원리도 모피질의 시스틴 결합구조를 바꾸는 것이니까 새로운 탄생이라는 것도 아예 허황된 주장은 아닌 것 같습니다. 따라서 이 '파마의 힘'에는 어떤탄생과 그로부터 기인한 일종의희열감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저는 우연찮게 그 희열을 맛본 것입니다. 이후부터 저는 외모를 가꾸려는 모든 노력에 대해 절대 폄하하지 않습니다. 아이가 쓸데없이 거울 앞에서 이리저리 서성이는 것도, 외출시간이 다 임박하도록 여전히 무언가를 찍어 바르는 아내도 다 용서가 되었습니다. 지금 막 좀 더 높은 차원의 에너지를 창출하는 중이니까요. 외모를 가꾸는데서 오는 만족감도 이럴진대 우리에겐 가꿈이 가능한 또 다른 차원도 존재하지 않습니까? 바로 우리의 내면말입니다. 고매한 정신세계를 이룩하는 일은 또 얼마만큼의 충만함을 가져다줄까요?
그리고 더 나아가 외모와 내면이 동시에 가꿔진 '파마'의 경지는 어떠한 것일까요?
그리고 또 그러한 경지에 도달한 한 인간이 느끼는 나르시즘과, 혹은 그런 그를 바라보는 경이로움은 과연 어떤 것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