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빨리 안 들어오고 뭐해? 빨리빨리"
"아놔. 이거 누가 쓰고 있나 봐. 중복 아이디래. 어떡하지?"
대학 때 일입니다.
아마 1인칭 슈팅게임이었던 것 같은데, 친구는 이미 접속을 끝내고 아직 입장하지 못하고 있는 저를 애타게 재촉하고 있었습니다. 그땐 저 유명한 스타크래프트의 열기도 차츰 사그라들며 - 여전히 큰 인기 중이었지만 - 새로운 게임들이 하루가 멀게 쏟아지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게임계의 춘추전국 시대였죠. 저와 친구는 여기 기웃 저기 기웃, 이게임 저게임 마우스가 닳도록 새로운 게임에 입문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보통은 늘 쓰던 아이디가 거의 통용되었는데 그날따라 먼저 아이디를 선점한 유저가 있었나 봅니다.
"아. 안돼 안돼, 오이 누가 쓰고 있어, 뭐 딴 거 없을까? 야! 야! 좀 생각해봐!" 저는 다급해 소리쳤습니다.
"아 씨! 음~~. 그냥 긴오이 해! 긴~~ 오이! 아무거나 해"
"....?"
그때도 그랬을까요?
지금 생각하면 정말 기가 막힌 순발력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아마 그날 '긴오이'가 패스(Pass)되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긴긴오이'가, 그것도 안되면 '긴긴긴오이'가 출격했을 겁니다.
그날 그렇게 탄생한 게임 아이디는..., 지금의 브런치 필명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사실 오이는 학창 시절 제 별명입니다. 왜냐고요? 얼굴이 길어서요^^
중학교 때 골격이 자리 잡아가며 전 얼굴이 길다는 사실을 별명을 통해 깨닫게 되었습니다. 정작 저는 아무리 거울을 봐도 별로 길다는 느낌이 없었는데 친구들은 얼굴이 길어 슬픈 '오이'라고 놀려 댔습니다.
그때 똑같이 얼굴 긴 친구가 하나 더 있었는데 그 친구는 '말상'으로 불렸고 - 이 친구는 기골이 매우 장대했습니다 - 그에 비해 상대적으로 골격이 가냘펐던 저는 '오이'가 되었습니다.
고등학교에 가선 외모로 별명을 붙이는 것은 유치하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친구들은 제게 '잠신' '하루방'이란 두 개의 별명을 붙여주었습니다. 하나는 책상에 엎어져 잠을 많이 잔다는 이유였고, 또 하나는 교과서에 실린 제주도 돌하르방의 필(feel)이 제게서 느껴진다는 이유였습니다.
대학에 와선 별로 별명이 붙지 않았는데, 군대에 가선 다시 '오이'가 되었습니다.
군대가 원래 그렇습니다. 신상에 대한 궁금증들이 왜 그리들 많으신지 여기저기 선임들마다 물어대는 통에 어느 정도 패턴과 답안들이 정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별명도 그중 하나였는데 '잠신' '하루방'은 따로 부연 설명이 필요했던 반면 - 매우 피곤했더랬죠 - '오이'는 그냥 내뱉는 순간 빵 하고 웃음이 터지더라는....^^
참 이상한 일입니다. 학창 시절엔 이 '오이'란 별명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만, 사연도 많고 탈도 많았던 군대에서 오이 병장, 오이 병장으로 불리며 정이 들었나 봅니다. 복학해서도 가끔 누군가 물어보면 서슴없이 "어. 난 오이"하고 쿨하게 답했습니다.
그렇게 '오이'란 정체성에 익숙해지고 있었는데, 어느 날 PC방에서 이 '오이'에 대한 저작권이 훌쩍 날아가 버린 것입니다. 초조해하는 저를 위해 친구는 - 지금 와서 보면 정말 오래도록 - '긴' 형용사를 붙여주었던 것입니다.
마치 '이름'만 존재하던 제게 '성'을 붙여준 듯 저는 그 친구에게 매우 감사합니다.
제2의 아버지와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런데 이 고마운 필명을 버리려 한 적도 있습니다. 바로 올해 일이니 그리 오래되지도 않았습니다.
언제였나면 브런치에 작가 등록을 신청할 무렵이었습니다. 저는 작가 등록에 몇 번 떨어졌었는데 정말 우습게도 그 못난 핑계를 저는 이 필명에까지 이어 붙였던 것입니다.
혹시 외설적으로 보이나?
다시 대학 때로 돌아가서, 이번에 롤플레잉(RPG) 게임에서, 재미난 채팅이 있었던 것이 기억납니다.
그때도 친구와 한창 게임 중이었는데 그 게임에는 서로의 아이템을 빼앗는 기능이 있었습니다. 일명 PK(PlayerKilling)라고 상대 유저를 킬 하면 그 유저는 모든 아이템을 떨구게 되고, 그 전리품을 줍는 와중에 다툼이 벌어졌습니다. 그 유저는 급기야 우리의 아이디를 보며 변태 같은 놈들이라고 욕을 퍼부었습니다.
그때 저는 당연히 '긴오이'였고, 제 친구의 아이디는 '불0큰 라이거'였습니다.
- 그때는 뭐 큰 타이거, 뭐 큰 라이거, ...드래곤 같은 이상한 아이디들이 지금의 밈처럼 유행했더랬습니다. -
그래서 대망의 브런치 작가 등록 시 제가 사용한 필명은 놀랍게도 순화된 '시 쓰는 오이'였습니다. 하지만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은 듯 불편했고, 얼마 전 저는 원래의 '긴오이'로 돌아왔습니다. 날카롭게도 한 작가님은 제 필명이 바뀐 것을 눈치채 주셨습니다.^^
저는 이 필명과 별명이 좋습니다. 오늘 글을 쓰다 보니 더욱 정감이 가는군요.
의도치 않았지만 어쩐지 외설과 순수의 경계선을 드나드는 아찔한 느낌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간 글의 주제에 있어 터부시 해온 분야가 있었는데 그것은 정치나 이념 같은 - 타협의 여지가 별로 없는 - 고도로 구축된 신념의 영역들이었습니다. 물론 이러한 관점에는 직업적 강령들도 영향을 끼쳤겠지만, 무르익지 않은 식견으로 현재와 장래에 대한 단정적· 혹은 예단적 견해를 드러내는 것은 아직은 섣부른 일이라 평소 생각하여 왔습니다. 덕분에 글에 대한 논쟁의 소지를 미리 제거하는 장점은 있겠지만, 또 한 편으로 치열한 현실의 이슈나 공론으로부터 도망치는 겁쟁이나 방관자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을 지울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필명에 대한 오래고 긴 사연을 적다 보니 '오이'에 '긴' 자 하나를 더 붙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작가의 관점이란 생각이 드는군요. 비록 그 '긴' 자 하나가 예기치 못한 논란과 비판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겠지만, 그때야말로 바로 그 '긴'이 지닌 오래됨, 꾸준함, 일관성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 되겠죠? 그냥 오이가 되어선 예전 그 PC방에서처럼 어느 순간 제 아이덴티티를 잃어버리게 될 터입니다. 친구는 어찌 훗날 제가 글을 쓸 줄 알고 이런 교훈을 던져 주었던 것일까요?
자유로운 사고와 사색, 논조를 잃지 않겠습니다.
갑자기 여러분의 필명에 대한 이야기도 듣고 싶어 지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