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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긴오이 Nov 17. 2022

엄마의 은행

브런치 100번째 글을 무엇으로 쓸까? 고민을 많이 했다.

어쩌면 오래전부터 주제를 정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100이라는 숫자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이제 한 번쯤 '이 사람에 대해 글을 써볼 때도 됐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



가족애가 남다른 사람이다. 나는.

가족 구성원에 대한 시나 수필들도 꽤 써오고 있는 터였으며, 아내도 이런 내 평가에 대체로 수긍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와중에도 유독 엄마에 대한 글만은 한 번도 다룬 적이 없다. 이쯤에서 '엄마와의 사이에 뭔가 있나 보다'라고 넘겨짚을 수도 있겠지만 사실 그렇지도 않다.


아직 엄마를 잘 모르겠다. 정확히는 엄마의 세계관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 수 없다.


어린 시절 기억 속에 엄마는 상당히 신경질적이고 감정 기복이 심한 사람이었다. 푸념과 욕설이 많았고, 잔소리가 심했으며 상황에 따라 몽둥이로 맞기도 많이 맞았다. 엄마는 옆 집 다른 엄마들에 비해 살림이 정갈하지 않았다. 음식만 보더라도 정성을 들이기보다는 빨리빨리 차려내는데 급급했다. 당시 아버지는 산판일 - 일종의 산림 가꾸는 일 - 을 하셨는데 이 일은 요즘도 작업이 고되기로 유명하다. 산에서 하는 일이다 보니 도시락을 싸서 다니셨는데 한 번은 아이도 아닌 아버지가 도시락에 대해 큰소리를 내시는 것을 목격한 적이 있다. 나중에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어쩌다 나도 한번 도시락 반찬을 보게 된 적이 있는데 지금 생각해도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동그란 보온 도시락을 싸 본 사람은 안다. 깊이 담는 밥양에 비해 그 위에 올려지는 동그란 반찬통은 너무 작아서 여간 신경을 쓰지 않고서는 그 많은 밥을 다 먹기 힘들다는 것, 아버지도 학생들처럼 옹기종기 모여 앉아 반찬통을 두근두근 개봉할 것이라는 점, 그 자리에서 반찬이 너무 궁색하면 나이가 오십을 넘든 육십을 넘든 누구나 어린 아이처럼 부끄러워진다는 점, 엄마는 아예 안 싼다면 모를까 아버지를 위해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도시락을 싸면서 그것을 펼치고 앉을 사람의 마음 하나를 왜 짚어내지 못하는 것일까? 그렇게 오래 같이 살면서 아버지 마음에 상처 같은 그 고추장 자국 하나를 왜 정갈하게 쓰윽 한번 닦아내지 못하는 것일까? 하고 화가 치밀곤 했다.



병원 초입의 은행나무는 노란 색색들을 바람 사이로 무수히 떨구고 있었다.


요즘에는 가로환경의 관리와 비용 문제로 은행나무가 점차 사라지고 있지만, 오랜만에 보는 노란 물결은 잠시 대화를 중단시키고 시선을 고정시켰다.


"와! 은행 봐라"


엄마는 혈압약을 받으러 와서 다른 처방도 함께 받는 듯했다.

주치의 선생님은 은행잎처럼 다정했다. 요즘 운동은 하고 계신지, 음식은 짜게 먹지 않는지, 지난번 골밀도 조사는 결과가 아주 좋다며 뼈 걱정은 안 해도 되겠다든지를 조곤조곤 설명해주셨다. 처음 엄마가 병원을 다니기 시작했을 때는 어딘가 분명 큰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 지레 짐작했었다. 억척스럽게 며칠 묵은 밥을 꾸역꾸역 말아드시던가, 짜고 맵고 한 것들을 잔뜩 모아 비벼서 후딱 배만 채우는데 급급하시던가, 유통기한 지난 오래된 밀가루며, 부침가루며, 각종 조미료 - 설탕, 간장, 식초, 소금 등 - 으로 음식에 간하는 모습들은 엄마 내부의 어떤 장기들을 필히 망쳐놓았을 거니 하는 선입견을 낳았다. 하지만 의사 선생님 말씀에 따르면 엄마의 장기들은 물론, 뼈 나이들도 상태가 매우 양호하단 말씀을 들었다. 오직 혈관 상태만 다소 좋지 않아서 앞으로 꾸준히 혈관 관리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조언을 들었다.


살림살이가 적성에 맞지 않는 사람도 있겠지. 엄마가 그랬다.


엄마는 그릇을 깨끗이 씻는데서는 아무런 의미도 찾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것은 단지 의미 없는 동작일 뿐 가치가 없는 행위이므로 그저 빨리 끝내는 것이야말로 최대의 선(善)이다. 하지만 식당에 나가 아르바이트로 설거지를 하게 된다면 이것은 완전히 다른 얘기가 된다. 그것보다 우선 되는 일이 없어진다. 당장 오늘 고추를 따야 하는 것도, 논에 약을 치는 일도, 가족끼리 오랜만의 외식도 모두 뒷전이 된다. 오늘 당장 명절 전이라도 일손이 바쁘다는 사장의 전화 한 통이 오면 그냥 달려 나가야 하는 사람이다. 한때는 엄마가 돈에 미친 사람이 아닌가 생각도 했다. 하지만 이런 흘겨진 눈총에도 불구하고 엄마의 생활력에 비례해 근로소득은 매년 증가했다. 눈에 보이는 살림들은 여전히 정갈함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대신 통장 속 숫자들이 늘거나 예적금을 옮기기는 종종 발걸음들이 바빠졌다.


공부 꽤나 한다는 소리를 들었던 나는 중학교부터 외삼촌 댁에 나와 유학생활을 했었다. 한 달에 두어 번 토요일 수업을 마치면 교복을 입은 채로 집에 가는 시외버스에 오르곤 했는데 지금도 여전히 기억에 남는 한 장면이 있다. 그때는 부엌이래 봐야 가스레인지 하나 없었고 아궁이에 불을 때 던 시절이었는데 오랜만에 만난 고향 친구들과 한참을 놀고 들어온 늦은 오후, 컴컴한 부엌에서 아버지는 내 교복을 빨고 계셨다.

아버지는 커다란 등을 잔뜩 구부리고 빨래판에 하얀 세제 거품을 잔뜩 일으키고 있었는데 그날의 하얀 풍경을 나는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이다.


반면 엄마는 아름답지 않으나 향기가 짙은 사람이다.


은행나무는 생명력이 강해서 가지와 뿌리를 제거하고 줄기만 남아도 몇 년간 잎이 돋는 일이 있다고 한다. 히로시마 원폭 투하 폭심지에서 2킬로 안에 있던 은행나무가 여전히 건강하게 살아남았다는 이야기는 여러모로 유명하다. 엄마는 그 은행나무처럼 생명력이 강한 사람이다.

어린 내 눈엔 그 생명력이 모질다 못해 천박하고 흉하고 때론 교양 없어 보이기도 했지만 그 끈질긴 생명력의 기운으로 내가 여태껏 고귀한 척, 고상한 척, 교만의 잎을 피운지도 모른다.

엄마는 생것, 그 자체인 사람으로 한 때는 엄마의 그런 기질이 어디서 근원 했는지 궁금하기도 했으나 엄마의 어린 시절을 증언해줄 외삼촌이나 이모에게서는 일체의 어떤 얘기도 들을 수 없었다. 엄마가 만약 요즘 엄마들처럼 아이들의 일거수일투족에 의미를 부여하고 자책하고 유난 떠는 모성이었다면 과거의 나는 엄마를 좀 더 들여다볼 수 있었을까?


그런 엄마가 손주와 손녀에게는 그렇게 딴 사람일 수 없다.


아무 날도 아닌데 오만 원권 지폐를 덥석덥석 쥐여주거나 행여 아빠인 내가 아이에게 큰소리라도 낼라치면 왜 쓸데없이 애 기를 죽이냐며 등짝을 때리시곤 한다. 그 손날이 때론 기가 막히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해서


"엄마는" 하고 크게 목소리를 높이려다가도 노란 웃음을 띤 은행 같은 미소를 보면 '세월이 흐르긴 흘렀나 보다' 하고 씁쓸해지는 것이다. 그러면서 물질의 풍요와 이기가 넘치는 이 세상에서 엄마는 행여 무엇을 후회하고 계신 것은 아닌지, 그에 비해 나는 아이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쏟고 있는 것인지 그냥 물끄러미 쳐다보게 되는 것이다.


아직 엄마를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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