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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긴오이 Oct 26. 2022

코로나 원래 이렇게 아픈 거였어?

2년 넘게 잘 버텼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코로나에 걸렸다. 


늦은 밤 집사람이 몸이 안 좋음을 느꼈고, 슬쩍 신속항원검사를 하였나 본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식탁 위에 두 줄짜리 키트가 잔뜩 미안한 표정을 하고 조용히 누워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마침 나도 목이 칼칼하고 아이도 비슷한 증상이 있길래 온 가족이 모두 코로나의 신세계로 입성하였음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회사에 연락하고 바로 병원으로 갔다. 세 식구 모두 빨간 줄이 선명하게 떴다. 약을 처방받고 7일간의 자가격리가 시작됐다.     


처음에는 ‘에라 이참에 푹 쉬자’라는 마음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오한 몸살이 2~3일 가겠거니 생각했다. 하루 반은 꽤 아프더니 3일째 되는 날 몸이 조금 가벼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벌써 회복기에 접어들었으니 남은 시간은 넷플릭스 영화나 보고, 브런치에 글도 좀 쓰고 하면서 나름 여유 있는 시간을 보내겠거니 했다      

그런데 3일째부터 목이 점점 더 아파왔다. 원래 나는 그 전에도 환절기엔 꼭 인후통이 왔었는데 최근에는 마스크 덕분인지 이 계절 통을 오랫동안 잊고 지냈다. 그러던 것이 코로나 인후통이 시작되자 그 이전에 그냥 넘겼던 증상들이 모두 한꺼번에 몰려온 듯 극심한 고통으로 다가왔다. 다들 아시다시피 침조차 넘길 수 없는, 식상한 표현이긴 하지만 정말 면도칼을 목구멍에 세로로 몇 개 꽂아 놓은 듯한 느낌이었다. 뭐라도 잠시 넘기려고 목젖이 꿀떡하면 그 즉시 날카로운 통증으로 온몸이 찌릿하고 경직됐다. 정확히는 목구멍 안쪽 편도보다 코와 식도가 연결되는 연구개 부근이 매우 아팠다. 편도가 붓는다는 게 의학적으로 어떤 모양새를 띠는지는 모르겠지만 거울로 비춰본 목구멍은 온통 새빨간 게 비의료인의 눈으로 보기에도 매우 심상치 않았다. 미각은 다행히 제 기능을 부여잡고 있는 것 같았지만 좀처럼 무얼 넘기지 못하니 입맛도 없고 많이 먹을 수도 없었다. 그럭저럭 억지로 먹긴 먹는데 속이 허한 느낌이 계속되었다. 먹는데 배가 고픈 것이다. 더욱이 인후통이 심해지자 오한 몸살이 다시 시작됐다. 목젖 저기 뒤쪽은 어디 사하라 사막 한가운데처럼 빠짝 바짝 마르기 시작했고, 밥은 목 먹겠고, 배는 고프고, 오한 몸살에 계속해서 누워있으니 몸과 마음이 가라앉고 허리 통증도 매우 고통스러웠다. 처방받은 알약 2알은 이 모든 고통을 상쇄시키기엔 숫자로서나 약발로서나 터무니없이 약해 보였다. 불현듯 아버지가 생각났다. 


노인네가 이 고통을 어떻게 견뎠을까?


사실 부모님 내외도 얼마 전 코로나에 걸렸었다. 아버지는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밥 한술을 못 뜨겠다고 아침 꼭두새벽부터 전화한 적이 있다. 웬만해선 아픈 내색을 안 하시는 분인데 '웬일로 전화를 다하셨을까?' 하는 것도 잠시 그땐 그 고통의 수위를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보통 2~3일부터 회복되기 시작한다는데 근 2주 가까이 차도가 없어서 엄마 말대로 괜히 별스럽게 구시는 건 아닌가? 하고 오해하기도 했다. 아닌 게 아니라 어느 날은 변이 안 나온다고 변비약을 사 오라고 하시는가 하면, 또 어떤 날은 설사가 심하다고 설사약을 사 오라는 오더가 오기도 했다. 지금 와서 보면 두 분이 다소 시차가 있게 코로나를 겪으시는 와중에 상대적으로 가볍게 극복하신 마누라님이 본인에게 별로 신경 써주지 않자 아들인 나에게 은근한 SOS를 보내셨던 것 같다. 나야 그래도 미각도 살아있으니 억지로 몇 술 떠넘길 수는 있었지만, 당시 아버지는 당최 구토가 나서 아무것도 먹을 수 없다고 하셨다. 찬물에 말아 겨우 밥 한술을 떠 넣는 것이 전부라고 전해 들었다. 그렇게 2주 가까이 고통스러워하시다 누가 암환자가 먹는 일명 밥맛 돌게 하는 약이 있다고 전해주었는데 그걸 먹고 겨우 입맛이 돌아오셨다고 했다.     

 

동병상련의 심정이 느껴지셨는지 아버지는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내게 전화를 주셨다.


"어이구, 고생 많구먼"


나는 아주 죽을 맛이라고 웃으며 대답했다. 속으로는 '아버지야말로 고생 많으셨네요'라는 소리가 올라왔지만 주워 삼켰다. 지금은 서로 말을 안 해도 그냥 통하는 게 있으니까 그것으로 충분했다.


5일쯤부터 목이 조금씩 나아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상태로라면 '7일 자가격리 안에 완전 회복은 불가능하구나' 느껴졌다. 6일째 날 다시 한번 코를 쑤셔보았는데 여전히 양성반응이 나왔다. 누구는 죽은 바이러스라 상관없다지만 당분간은 개인소독은 물론,  직원들과 식사 등의 겸상도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체중은 한 3kg 정도 빠졌으며, 몸은 여전히 뻐근하고, 안 나오던 마른기침이 시도 때도 없이 폭발하곤 했다. 


7일간 자가격리가 끝나고 첫 출근하는 날, 신발의 느낌이 무척 낯설었다.

마치 처음 신발을 신어보는 듯한 느낌이랄까? 

하늘은 청명히 높고, 학교 가기 싫어하던 아이도 오랜만의 등굣길이 무척 설레는 듯했다. 


일상으로 돌아온다는 것, 그 반가움을 격하게 축하하기 위해 우리는 마주 잡은 두 손을 높이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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