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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긴오이 Jan 31. 2023

루브르 박물관 앞의 엄브렐러


우산에 관하자면 나는 아주 재미난 에피소드를 하나 가지고 있다. 특정한 사건이 아닌 사물에 얽힌 이야기 하나를 장착하고 있다는 것은 마치 토크쇼에 대비해 개인기 하나를 장착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심리적으로 매우 든든하다. 적어도 비 오는 날이거나, 혹은 그런 날에 우산을 안 가지고 온 사람과 마주 앉는다면 나는 최소한 15분 정도는 떠들어 댈 수 있는 치트키 하나를 준비하고 있는 셈이다. 그것을 대화 테이블에 올릴지 말지는 순전히 나의 재량이지만 그런 에피소드 하나가 내재되어 있다는 것은 생각보다 큰 자산이 된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물론 그렇다고 이 이야기를 들려줬을 때, 상대로부터 늘 깔깔 터지는 웃음보를 보장받는 것은 아니다. 반응이 영 시원찮을 때도 있다. 그래도 나는 우산에 대해서 만큼은 이상하리만치 인상적인 경험치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 대해 내심 자랑스러움을 느낀다. 전혀 그럴 일이 아니지만, 적어도 그것이 저절로 얻어진 것은 아니라고 확신한다.


이것은 파리 여행 중에 있었던 우산에 관한 이야기다.


스마트폰보다 와인잔을 먼저 꺼내는 여유 (brunch.co.kr) 에서 밝혔다시피 2012년 10월 경, 나는 직장 동료 4명과 짝을 이뤄 유럽 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다. 그날은 루브르 박물관 투어를 하기로 한 날이었는데, 한 명은 다른 전시전을 보겠다고 혼자 떨어져 나가고, 우리 셋이서 박물관 앞에서 줄을 서고 있었다. 워낙 유명한 관광지라 대기줄이 길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막상 기다란 사람들의 머리통 숫자를 가늠해 보자니 한숨부터 절로 나왔다. 더구나 그날은 비까지 우중충 내리는 날이었다. 아주 굵은 빗방울은 아니어도 분무기에서 막 분사되는 그런 미스트 같은 이슬비는 결코 아니었다. 우산이 없었더라면 영 꼴이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다행히 우리 셋은 모두 우산을 가지고 있었다.


"그나저나 파리까지 와서 루브르를 안 보고 다른 기획전을 보러 간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심보야?"

이야기를 먼저 꺼낸 것은 나였다. "냅둬, 자기가 보고 싶은 거 보는 거지 뭐"

"그래도 지리도 익숙하지 않은데 따로따로 행동해서 되겠어? 함께 움직여야지"


불만스레 이야기했지만 크게 개의치는 않았다. 워낙 고집이 센 위인이라 말렸어도 들을 성격이 아니며, 또한 이렇게 비가 내리는데 우산도 없이 혼자 궁상떨 것을 생각하니 차라리 눈에 안 보이는 편이 낫겠다 싶기도 했다. 아닌 게 아니라 도착한 날부터 갑자기 비를 만나는 경우가 많아서 우리는 각자 우산을 사기로 했다. 비옷을 가져오긴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짐을 줄이기 위한 예비 방편일 뿐, 이동상의 편의를 위해서는 비옷보다 우산이 더 편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일행 모두 우산 가게에 들렀는데 K만 '난 괜찮아 점퍼가 방수라 상관없어' 하고 고집스럽게 거부했다. '보기 불편해서 그래, 벌써 옷이 다 젖었잖아'라고 말했지만 소용없었다. 오늘만 해도 방수 기능이 다했는지 자꾸만 옷이 촉촉이 젖어가길래 우산 안으로 들어오라고 했더니 계속 '괜찮다 괜찮다'만 연발했다. 이쯤 되니 이쪽도 괜스레 짜증이 나서 '그냥 알아서 해라'식으로 포기한 참이었다. 얼마 하지도 않은 우산값에 뭘 그리 기겁을 하는지..... K는 오늘도 알 수 없는 이유로 자기만의 여행을 만끽하러 혼자 가버렸다.


줄은 여전히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비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지루한 시간을 때워보고자 이런저런 이야기를 두서없이 꺼내기 시작했다. '확실히 유럽이 멀긴 멀다느니, 날씨는 왜 이 모양이냐느니, 집 나오면 원래 고생이라느니, 그러게 자기는 예전부터 사무실이 세상에서 제일 안락하다고 생각했다느니, 자유여행이 원래 이렇게 힘든 것이냐느니' 별의별 이야기가 비와 함께 쏟아져 내렸다.


그것은 비단 우리만의 사정 아니었다. 길게 줄을 선 모두가 한결같이 지루한 시간을 온몸으로 견디고 있었다. 영어도 들리고, 불어도 들리고 온갖 언어가 짬뽕이 되어 시시콜콜한 이야기로 흘러넘치는 것 같았다. 다만 그들의 대화에는 심심찮게 유쾌한 웃음들이 가끔 섞이곤 했는데 우리들의 대화에만 일절 웃음이 없었다. 아마도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어 낯선 나라에 위축감을 느꼈는지 모르겠다. 아닌 게 아니라 여행 첫날 어렵게 지하철을 빠져나온 우리 일행에게 고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무리가 다가와 놀리듯 담배를 달라고 했다. 위협적이진 않았지만 뒷맛이 찝찝한 불쾌한 상황이었다. 애써 태연한 척 우리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엇, 어 어~~~


갑자기 비바람이 몰아쳤다. 광장에 서 있던 모든 줄들이 일제히 한쪽으로 몸을 돌리며 한껏 움츠러들었다. 꺅하는 비명소리도 들렸다. C도 몹시 당황해하며 "에라이"하고 욕 비슷한 뭔가를 토해냈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불어온 바람에 우산대가 꺾이고, C의 머리칼도 바짝 곤두서 휘날리고 있었다. 우산은 그 곱던 볼록 곡선을 한껏 뒤집어 까고 찌그러지듯 안쪽 살을 드러내 놓고 있었다. C가 얼른 우산대를 휘어잡았으나 바람이 지나가자 우산은 폭탄 맞은 지붕처럼 찌그러져 있었다. 웃기기도 하고 멋쩍게 서있는 C가 안 돼 보이기도 하고,


 "우리 우산은 괜찮은데 니 건 왜 그래? 같은 메이드 인 프랑슨데" 하고 농담을 건넸다.


C는 "이건 메이드 인 차이나예요" 하고 답했다. "뭐라고? 아까 같은 데서 샀잖아"  물었더니 자기는 아까 제일 싼 걸로 샀단다. 어쩐지 우산 모양이 좀 투명하니 약해 보인다 싶었는데 몇 유로 아끼자고 궁상떠는 놈이 여기도 구나 싶었다.

"괜찮아요, 우산도 없이 다니는 사람도 있는데요. 뭘" C는 자기가 제일 막내이면서도 너스레를 떨었다.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이 자식 K형 없다고 막말하네" H도 오랜만에 웃음을 보였다.

"며칠 계속 써야 할 것 같은데 좀 좋은 걸로 사지 그랬어?" 나는 웃으며 혀를 찼다.

C가 자기 걱정은 말라며 대충 우산을 이리저리 펴보는데, 흑형 하나가 갑자기 다가오더니


 "엄브렐러(umbrella)!"

       

하고 외쳤다. C는 당황해하며 "노! 노! 아엠 오케"  했다. 그러자 흑형은 "유, 브로큰! 엄브렐러" 하고 우산을 내밀었다. C는 기겁을 하며 '노!, 노!' 를 연발했다. 흑형은 한참을 뭐라 하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돌아갔다.

C는 찌그러진 우산처럼 썩은 표정을 하곤 "뭐야, 갑자기 깜짝 놀랐네" 하고 우산을 고쳐 잡았다.




비는 아까보단 다소 누그러진 듯했다. 사람들도 갑자기 불어닥친 비바람에 잠시 어수선했으나 금세 줄의 탄력을 회복하고 있었다. 파리의 10월 기온은 생각보다 쌀쌀했다. 한기가 더욱 몸을 휘어 감았다. 우리는 움츠리고 서서, 발도 구르고, 앉았다 일어나기도 하고 연신 몸을 풀었다. 그때 어디선가



 "헤이! 브라더! 유 니드 엄브렐러(umbrella)?"   



하고 또 다른 흑형 하나가 다가왔다. C는 진심으로 당황한 듯했다. "오! 노. 아엠 오케, 댙츠 올라잇~ 노 프라블럼" 하고 한 걸음 물러섰다. 흑형은 "디스 엄브렐러, 베리 굿" 하며 우산 하나를 폈다 접었다 했다. C는 아주 곤란하단 표정을 하곤 이쪽을 쳐다봤으나 우리로서는 딱히 보탤 말이 없었다.

'그러게 좀 괜찮은 우산으로 사지 그랬어' 하고 나는 속으로 빙긋 웃었다. C는 어렵게 흑형을 물리치고 나서 다소 풀이 죽은 모습으로 "아~ 괜히 쪽팔린데요" 하고 고개를 저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다들 우산이 멀쩡한데 C만 우산이 망가져 있으니 조금 의식되긴 했나 보다. 더구나 먹이를 노린 하이에나처럼 자꾸 흑형들이 다가오니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구역 내에서의 존재감을 한껏 드러내고 있었다.


줄이 조금씩 줄어들어갔다. 아까까지만 해도 박물관의 상징인 삼각 유리돔이 저만치 앞에 있었는데 어느새 근처까지 다가와 있었다. '이게 말로만 듣던 루브르의 상징이구나' 싶던 찰나


 "헤이! 맨! 엄브렐러(umbrella)!"


또 한 번의 엄브렐러가 찾아왔다. C는 "야이 씨! 아이 노 노!" 하고 크게 손짓했으나 흑형은 "와이? 유 브로큰! 유 니드 엄브렐러" 하고 바짝 다가섰다. 나는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왔다. C는 키가 188센티 정도나 되는데 이렇게 멀대같이 큰 놈이 찌그러진 우산을 쓰고 있으니 근처에 있던 흑형들이 '옳다쿠나' 하고 덤벼드는 것이다. 더구나 한 흑형이 떠나가면 상황을 모르는 또 다른 흑형이 다가오고, 또 다가오고 하는 식이다.


주적주적 비는 내리고, 줄을 선 시간만 2시간 가까이 되었다. 이야기 꽃을 좀 피우나 싶으면 여지없이 '엄브렐러'가 다가오고, 또 쫓았나 싶으면 또 다른 '엄브렐러'가 나타나고, 이런 상황이 대여섯 번 계속되니 우리는 아예 광장의 메인 호객이 되고 말았다. 어느 새부터는 흑형이 다가오면 주위 사람들이 일제히 "엄브렐러?" 하고 함께 외쳐주기까지 했다.



"헤이, 아 유 코리안?"    



급기야 앞뒷줄에 섰던 사람들이 친근하게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옙 땡큐, 위아 코리안' 우리는 멋쩍은 듯 웃으며 둘러댔다. 개중에 한분은 C에게 아예 우산을 접으라고 하고, 친절히 자기 우산의 곁을 내어주며 어깨를 두드렸다. 예상치 못한 작은 소동으로 긴 줄의 지루함이 잠시 걷히고, 그 순간만큼은 뭔가 사람들 모두가 커다란 우산 하나를 함께 쓰고 있는 듯했다. 그것은 먼 타국에서 겪은 돌발 사건이었으나, 파리의 멋진 예술작품이나 건축물 못지않게 강한 인상으로 남았다. 그리고 시간이 지난 지금도 전혀 현장감을 잃지 않고 있다. 어쩌다 화면에 루브르가 비추기라도 하면 나는 여지없이 그날이 떠오른다. 그것은 마치 자성처럼 평소엔 아무 작용없이 팽그르르 돌다 망가진 우산이나 구부러진 우산을 보면 북쪽을 향하듯 딱 멈춰 서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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