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이 약한 편이다.
약한 주량은 여러 면에서 불리한 점이 많다. 굳이 「불편」이 아니라 「불리」라는 단어를 고른 데는 이유가 있다. 한국 사회에서 주량이 가지는 아우라는 업무능력 못지않게 중요하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여전히 술 잘 먹는 사람이 업무도 잘한다는 이상한 명제를 신봉하는 상사분도 더러 계신다. 물론 이해한다. 업무를 하다 보면 관계 위주로 푸는 것이 훨씬 더 효율적일 때가 있으니까. 큰 단위의 프로젝트가 아니면 사사로이 술자리를 갖는 이른바 친목 네트워크들이 의외로 강점을 지닐 때가 있다. 귀찮은 공문이나 기획안은 패싱하고 전화 한 통으로 모든 것을 한방에 해결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지엽적 이야기일 뿐, 업무의 본질을 이 네트워크로 커버할 수 있다는 생각은 위험하다.
어쨌거나 이야기가 여기쯤 와서는 일도 잘하고 술도 잘 먹는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 아닌가? 이 두 가지 능력을 겸비한 사람은 어디 가든 승승장구한다. 애석하게도 그런 점에서 보자면 나는 술의 능력치로는 보통 이하인 사람이 된다. 그럼 업무능력에 대해서는? 음~ 이 이야기는 논외로 하자.
내게 있어 '술'은 관조의 대상 어디쯤이었다.
체질적으로 풍덩 빠져들 순 없고, 그렇다고 아예 무심할 수도 없는 계륵의 영역이었달까? 솔직히 말해 누가 권하지 않는다면 일 년 내내 술 따윈 거들떠보지 않을 수도 있다. 혼술이 유행이라지만 혼자서 술을 먹어보고 싶다는 욕구 자체가 없다. 술을 좋아하지 않는 아내도 가끔은 맥주 한 캔 정도를 딸 때가 있는데 이 쪽은 전혀 그런 욕구가 들지 않는 것도 신기하다. 더욱이 웨이트 훈련을 시작하면서 그놈의 근손실 타령은 내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술자리는 가급적 피하려고 하고, 술을 마시는 것은 일종의 '직장생활의 애환일 뿐이다'라고 늘 항변하면서도, 이상하게 아예 술을 못했으면 하는 마음을 가져본 적은 결단코 없다. 그야말로 '나는 자연인이다'가 아닌 다음에야 공공서비스 종사자로서, 그리고 직장 내 대인관계의 연결수단으로써 술을 뺐을 때 받아들여야 할 마이너스 손익계산서를 감내할 용기가 없다. 실제 심장 관련 검사로 며칠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는데 의사로부터 만약 영원히 금주해야 합니다란 선언을 들었다면 그것은 대출 만기 연장 불가 통지처럼 청천벽력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단지 술을 좋아하고 아니고를 떠나서 내가 진지한 직장인이라는 가정하에 조금만 생각을 확장해 보면 이것은 내가 가진 능력치 중 이른바 차 떼고 포떼고 일하라는 통보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세상에 제일 재미없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이 되라는 말과 같다. 나는 그 고독과 낭패를 표정의 변화 없이 받아들일 자신이 없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즐기지 않는다 해도 초대의 대상에 분류되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은 엄밀한 차이가 있다. 그것이 당장은 오늘 저녁 여섯 시 술약속의 명단이 될지는 몰라도 이번 분기 승진 대상자의 명단으로 그대로 적용될 수도 있다. 이것이 사회에서 '술'이 가지는 역할과 영향이다.
인류의 역사에서 술이 빠진 적이 있었던가? 오죽하면 술을 신의 음료라 찬양하지 않는가?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으로 술은 훌륭한 역할을 한다. 술 한잔 속에 담긴 소통, 유대, 공감의 끈끈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그날도 그런 관계에서 시작되었다.
마침 연말이겠다, 좀처럼 마주 앉을 기회도 없었는데 정년을 앞두고 심란해한다는 얘기를 듣고선 조만간 자리를 한번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는 터였다. 술을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결심이었다. 대개 술자리에서 하는 이야기들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지만 그날은 내심 속내를 읽히든 읽든 둘 중의 하나는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냥 그런 날이 있다. 이야기가 고픈 날. 그리고 여지없이 그런 날은 사고가 터진다.
으레 오가는 그렇고 그런 대화는 끝나고 우리는 드디어 그것을 만났나 보다. 오늘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 그것이 나로부터 인지 그로부터 인지는 모르겠지만 울컥하는 주제들이 나왔다. 어찌 보면 내가 간교했을 수도 있다. 내 마음속 울화들을 해소하지 못해 안절부절못하다가 마침 열받는 일이 많다고 소문이 도는 사람을 불러다 앉히고 슬슬 장작을 때는 격이었다. 술을 한잔 따르고 요즘 힘드시지요? 하고 건네니 이때다 싶은 한탄과 울화들이 일제히 쏟아져 나왔다. 거기에 슬쩍 묻어 내 속도 거칠게 쏟아냈다. 과격한 밤이었다.
S형님의 반짝이는 눈빛까지는 본 것 같다. 쩌렁쩌렁 울리던 목소리와 맞장구치던 K형, 술이 세다고 익히 들었지만 좀처럼 그 모습을 연출하지 않던 K양까지..... 일정 주량이 넘어가면 술의 맛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방금 전까지 역한 알코올 냄새에 먹으면서도 토가 나올 듯하다가도 그 경계선의 허들을 일단 넘어서면 술의 쓴 맛이 사라지고 맹물처럼 느껴지는 단계가 온다. 일 년에 한두 번 발생하는 일이지만 이때가 오면 나의 자아가 서서히 분리되는 느낌이 들고 '이봐 정신 차려, 너 지금 맛이 가고 있잖아! 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온다. 게슴츠레 흔들리는 눈동자는 떠나가는 의식을 무기력하게 바라본다. 속으로 '야 이거 안되는데' 하다가
눈을 뜨니 아침이었다.
대개는 술에 취해도 띄엄띄엄 기억이 나는 법인데 이 날은 통째로 기억이 사라졌다. 존재한 시간 자체가 사라진 느낌이다. 별안간 침대에 누워있는 나와 둘러싼 공간을 의식하면 등골이 오싹해진다. 어떻게 왔을까? 걸어서? 택시를 탔나? 누가 바래다줬나?
그렇게 되짚다 보면 '아이쿠야 술을 마시는 도중에 필름이 끊겼구나'가 확인되는 것이다. 보통은 집에 와서 누운 후부터가 점멸인데 이런 날은 술자리에서 기억이 안드로메다로 출장 가버리는 것이다. 그야말로 좀비 그 자체다. 술좌석에 다른 일행들이 오고 갔었다 하고, 웃으며 한 잔 더 마셨다 하고, 택시를 같이 탔쟎냐 하고......
충격적이었던 것은 그날 술집 종업원이 저 쪽 테이블은 이제 술 그만 갖다 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했단다. 그랬다는 얘기를 K양으로부터 들었다. 그로부터 이틀 뒤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