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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긴오이 Jan 26. 2023

입맞춤의 시간이 올 때

사랑의 이해


첫 키스가 언제였던가?


물음을 품자 피식하고 웃음부터 나온다. 지금 이 나이에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우습지만, 또 한편으로 그런 생각을 할 줄 아는 내가 기특하기도 하다. 어쨌든 진지하게 기억을 더듬어 보자면 키스답진 않았어도 이성과 입술이 맞닿은 경험은 대학교 1학년 때였다. 과 동기였는데 그녀는 늘 어딘가 들떠 보였다. 그것이 처음 맞는 대학 생활의 주체할 수 없는 자유로움 때문이었는지, 오랜 수험 생활의 드넓은 해방감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같은 고3 시기를 거쳐온 나와는 달리 그녀는 확실히 오버(over)한 가벼움을 지닌 듯 했다. 웃음과 눈빛과 걸음과 치마 길이들이 모두 그랬다. 그렇다고 내가 그녀를 가벼이 - 그러니까 성적으로 혹은 이성으로서 - 생각한 것은 아니다. 그녀의 들뜬 활기에 비하자면 나는 여러모로 조심스럽고 어둡고 말수가 없는 시기였다. 그것은 일종의 컨셉일 수도 있었겠지만 - 폼 잡는 - 내게 그런 컨셉이 스며들기 시작했던 데에는 대학 진학과 관련하여 부모님과 있었던 다툼의 불똥이 어느 정도 기인하기도 했다. 실제 나는 입학 전 기대에 한껏 부응하지 못했던 입시결과와 그로 인해 오갔던 사나운 말들과 그리고 당연하게 남은 할큄의 상처들을 곱씹느라 한동안 캠퍼스 생활의 중심으로 들어서지 못하고 겉으로 맴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캠퍼스 곳곳으로 붉은 영산홍이 무더기씩 피어오를 무렵이 되어서는 나의 우울과 궁상들도 더 이상 당해낼 도리가 없었다. 젊고 풋풋한 에너지들이 그야말로 은은한 아지랑이처럼 곳곳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서로가 서로를 간지럽히던 시기였다.


그 아이는 집에서 통학을 하고 있었는데 행정구역을 넘어가는 사정으로 저녁 늦은 시간이 되면 - 한 여덟 시 반쯤 - 언제나 터미널로 달려가곤 했다. 밝고 발랄한 그 애가 유일하게 무거워지는 순간이었다. 어쩌면 통금에 해당하는 그 귀가시간의 구속마저 없었더라면 그녀는 이내 세상에서 가장 자유분방한, 혹은 방탕한 대학생활에 젖어들어갔을지도 모른다. 왠지 그런 예감이 들게 하는 아이였다. 그 애는 터미널로 가는 그 무거운 귀가 발걸음을 에스코트해 줄 남자애들을 끊임없이 갈구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그 에스코트의 남자들을 매번 바꾸는 것으로 우리 동기들보다 차별화된 혹은 앞서가는 어떤 연애 선구자로서의 우월감을 느끼는 듯했다. 우리끼리 밤늦도록 이어지는 술자리와 그런 자리에서 흔히 일어나는 예측할 수 없는 이벤트들의 연속에서 이른 귀가시간 때문에 소외되는 어떤 상실감을 그것으로 대체하는 듯했다. 하지만 단순히 그녀를 바래다주는 것만으로는 자꾸만 떨어져 나가는 남자애들을 그 애도 어쩔 수는 없었나 보다. 그 시기에 순수한 기사도 정신은 한 번이나 두 번이면 족했지, 한창 마시고 어울리고 싶은 우리들에게 그 에스코트 시간은 서로 사귄다면 모를까 아무 의미 없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회전초밥처럼 돌아가던 그 순환 노선에 마침내 내 순번도 왔었던 것 같다.


당시 나는 빨간색 바이크를 가지고 있었다. TN-125라고... 추억의 VF가 도로를 폭주하던 시기, 특이하게 쌍라이트를 장착한 이 바이크에 매력을 느껴 세 달가량의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오토바이 수리점 사장님으로부터 인수받았다. 말없고 척하는 듯한, 게다가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 겉도는 아웃사이더에게 먼저 말을 거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텐데도 그 애는 어느 날 자기를 바래다 달라고 졸랐다. 사실 전혀 그럴 기분도 아니었고, 또 그간의 그 애의 행동에 대해 조금 들은 것도 있고 해서

"뽀뽀나 한번 해준다면...." 나는 던지듯 말했다. '심심한데 뽀뽀나 한번 할까'라던 유행어가 난무하던 시기였지만 스스로도 그렇게 내뱉고 적잖이 놀랐다. 당시의 숫기로는 전혀 상상해 본 적 없는 멘트였기 때문이다.

'좋아' 그 애는 별거 아니라는 듯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그 애를 터미널에 데려다주고 나는 그야말로 수고비조로 '뽀뽀'를 받았다. 그야말로 어정쩡한, 무슨 계약서 이행조치를 취하듯, 이것이 남녀 간 신체접촉인가? 음미할 시간도 없는 애들 장난 같은 입맞춤을 했다.


그리고 그날 기숙사 방에 돌아와 침대에 깎지를 끼고 누워 아무것도 없었던 첫 뽀뽀를, 좀 더 완숙한 키스의 여운으로 상승시켜 보고자 갖은 애를 썼다. 하지만 나도 알고, 그 애도 아는 이 싱거운 이벤트를 첫 그것으로 상승시키는 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리고 그때 내가 무엇을 느꼈냐면 - 당시로서는 구체적으로 묘사할 수는 없었지만 - 서로 입술을 맞춘다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 일일 수도 있겠다란 생각을 했다. 싱거운 경험이긴 했지만 터미널에 도착했을 때, 잠시 어색했던 가운데서, 그것을 뚫고 무언가를 말해야 했을 때, 그것을 농담처럼 이야기할 것인지 진지하게 할 것인지, 아까까진 멀쩡했는데 조금 쿵쾅쿵쾅 해지고, 그 애가 어떻게 생각할지, 조금 좀스러운 것은 아닌지, 입에서 냄새가 나는 것인지, 아까 담배를 피우지 말걸 그랬나, 이 아이가 정말 응해줄 것인가, 나는 눈을 감아야 하나...... 하는 과정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 싱겁지 않은 이벤트였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것이 이렇게까지 실망스러운 데에는 설령 좀 전의 그것이 좀 더 깊은 입맞춤이었다 하더라도 빠진 무엇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생각해 보자면 '사귀자'는 일종의 합의가 아직 싹트지 않은 상태에서 어느 날 우연찮게 입맞춤을 하게 된다는 것이, 혹은 그런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낭만적 가정을 제외한다면 확률상으로 이것은 번개 맞을 확률보다도 더 낮다고 나는 생각되었다. 물론 이것은 즉흥적 만남이나 원나잇 트렌드의 일부 세태에서는 참 우습게 들리는 한심한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세상에는 죽었다 깨도 이성에게 번호를 따는 일은 상상조차 안 되는 타입도 있다 - 일반적 연애의 관점에서 이야기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전희로서의 키스가 아니라 입맞춤 뒤의 그다음이 전혀 고려되지 않은 순수한 의미의 입맞춤을 말한다면 나는 인생에서 그런 입맞춤이 언제였는지 가물가물하다. 생각나는 것이라곤 그때 그 애와의 '뽀뽀'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이제 서로 알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는, 그것이 학교든 직장이든 매일 얼굴을 보는 가운데 꽤 호감이 자라나는 상대에게 모든 상황이 딱 맞아떨어져 그야말로 로맨틱한 입맞춤이 연출되기까지는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지 현실에서 일어날 확률은 제로에 가깝지 않을까? 무엇이 동해서 일식이나 월식처럼 아무런 심리적 없이 천천히 얼굴을 포개고 입맞춤을 하는 그런 심리적 교감을 나는 인생에서 찾을 수 있기나 한 걸까? 하는 생각들을 했다.


그런 점에서「사랑의 이해」는 꽤 뜨거웠다.


아주 즐겨보진 않더라도 간간이 나는 드라마를 즐기고 있는데 우연찮게 어제 드라마 속 한 키스장면을 봤다. 나이 먹고 이게 무슨 주책인 진 몰라도 정말 근래 보기 드문 근사한 입맞춤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입맞춤 장면을 침을 꿀꺽 삼킬 정도로 긴장하며 지켜보고 난 후, 불현듯 대학 때 그날의 상념이 떠올랐던 것이다.

아마도 그때 내가 생각했던 진짜 입맞춤은 바로 이런 거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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