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은 시간때우기 좋은 연료지만 너무 한 잠 푹 때려 넣으면 영혼이 너덜해진다. 일요일은 본가에 좀 다녀오려 했는데 오후 세 시가 넘어 버리니 이내 '될 대로 돼라'가 되어버렸다. 계획이고 뭐고 몸뚱이는 만사가 귀찮아졌다. 좀 생산적인 일요일을 만드려 했는데 계획이 어그러지자 기왕 망친 거 밑바닥까지 찍어보자는 심산으로 계속 누워있었다. 아내는 청소기도 좀 돌리고 쓰레기도 좀 내다 버리라는데 정말 갖다 버리고 싶은 건 너라는 눈초리로 노려보고 있을 것이다. 슬며시 몸을 돌려 더 깊이 잠든 척했다.
이렇게 침전하는 것에 익숙하다. 문제와 상황들로부터 몸을 돌리고 버티기로 일관하면 내가 못났단 생각이 든다. 그런데도 일단 가라앉기 시작하면 멈추기 힘들다. 실상 이것은 문제해결은 커녕 그 근처도 못 가는 쓸데없는 시간낭비인데 시간을 죽이는 뫼비우스의 띠에서 벗어날 생각이 없다. 알맹이 없는 상념들을 둥둥 띄우고 손깍지 베개를 하고 천정을 보다가, 다리도 좀 긁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한다. 무의미에서 의미를 구한다기보다는 백석 시인처럼 어지러운 마음의 한탄과 슬픔들을 가라앉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가라앉을 것들이 다 앙금이 되어 가라앉으면 백석은 외로운 생각만이 든다고 했는데 나는 그제야 뭘 좀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게 아니면 '뭘 좀 먹어야겠다' 는 생각 때문에 슬슬 궁상을 끝내는지도 모른다.
2020년에 주식을 하나 샀는데 어쩌다 보니 3년째 들고 있다. 세상에 존버에 재능 있었다니. 사실은 사자마자 물리는 바람에 강제 존버상태이지만 그래도 3년을 들고 있을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그 흔한 물타기 한번 없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차트의 폭포수를 견뎌냈다. 누구는 앱을 삭제해야 가능한 일이라고 했지만 크게 어렵지도 않았다. 내돈 내산인데 뇌동매매를 걱정하여 보고 싶은 차트를 열어보지도 못한다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마이너스 70%를 터치했을 때도 속은 좀 쓰렸지만 앱 삭제 같은 건 고려하지 않았다. 나는 외면에 대해선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니까. 수수와 방관에 대해선 타의추종을 불허한다. 맘만 먹는다면 워렌버핏보다 장기투자할 자신이 있다. 워렌보단 내가 더 오래 살 테니까 수제자로 거둬줘도 좋을 텐데. 주식은 정보, 자본, 분석력이 지배하는 현대사회에서 유일하게 방관적 자세가 미덕으로 작용하기도 하는 투자 세계다. 이 세계에서 개인은 수식 그대로 개미 같은 존재지만 남아도는 게 시간밖에 없다면야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다. 시간이야말로 개인이 가진 유일한 무기인 셈이고, 침전과 방관 같은 비생산적 기질이 돈까지 벌어준다면야 나야 땡큐지. 언제든 겨울잠을 맞이한 곰처럼 잔뜩 웅크릴 준비가 되어있다. 정말 그렇다면 행복하겠다.
최근에는 시간을 뭉개는 것이 문제해결의 한 방식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굳이 손을 쓰지 않았는데 저절로 해결되는 문제도 있더라. 예전에는 선보고 후조치가 아니면 아주 큰일이라도 나는 줄 알았는데 어느 날은 선보고를 못했더니 후조치도 따라붙지 않았다. 이후론 할까 말까 망설여지는 일들은 무조건 하루 숙성시키기로 했다. 애초 맛이 들지 못할 일들은 저절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처리할 일들을 미리 해놓지 않으면 불안해지는 성격이었는데 그렇다 보니 일은 끊임없이 밀려왔다. 모레 일을 미리 처리해 놓으면 글피에 새로운 업무가 생기고, 글피의 일을 미리 처리해 놓으면 그다음 일이 또 밀려오는 식이다. 일이야 늘 파도처럼 밀려오니까 마감만 문제없다면 내일 일은 내일 착수하는 것이 현명하다. 오늘의 빈 시간은 오늘만 달콤하니까, 유효기한이 지난 내일은 더 이상 달콤하지 않을 수 있다.
가끔은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서 내일 퇴직을 맞이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일이 싫어 오늘 당장 때려치우겠다가 아니라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고된 직장생활을 잘 버텨낸 미래의 내가 궁금하다. 그 긴 존버의 끝에서 나는 무엇을 만날지. 그때가 되어서도 여전히 얼마간의 돈벌이는 해야겠지만 그래도 약간은 진정한 의미의 은퇴에 다가가 있지 않을까. 일정 시간에 도달하여 이제 남은 것이라곤 껍데기 같은 순수한 여생뿐인 삶이란 어떤 것일까. 그때의 시간은 또 어떻게 흐르려나.
사실 나이는 먹었지만 아직도 정신계의 극적인 레벨업을 경험해 본 적이 없다. 의식 속에서는 열 살 때의 나나, 마흔 대의 나나 별반 차이가 없는 것 같다. 경험치와 지식은 쌓였을지언정 그것들을 가지고 NPC처럼 펑하고 융합해 내는 강화과정이 없었으니 연금술적 깨달음도 없다. 그러니 이 나이 먹도록 고유한 철학이나 개성도 확립하지 못했지. 가끔 깊은 사유와 통찰을 보여주는 좋은 글들을 만나면 나보다 어린 나이임에도 어떻게 이런 멋진 글들을 쓸 수 있을까 작가에게 감탄하곤 한다. 나는 죽었다 깨나도 그 용빼는 재주는 없을 것 같은데 글은 써서 뭐 하나 싶기도 하고. 지금은 그냥 좋아서라고 변명할 수도 있지만 이런 마음과는 달리 좀 더 잘 써보고 싶은 욕심은 계속해서 자라고 있다. 마음 한구석에선 뭐라도 좋으니 올해 안에 어디 입상이라도 해봤으면 좋겠다란 목표까지 설정해 놨다. 아주 웃기는 짬뽕이다.
목표 얘기가 나왔으니 조회수에 대한 이야기를 뺄 수 없다. 늘 한자리 수 조회수에다 라이킷은 20을 넘기지 않으니 소박하게 올해 순수 조회수로 도합 10,000을 설정해 놨었다. 한 자리, 어쩌다 나오는 두 자리 조회수로는 한 1년은 걸려야 일만 조회수가 달성되지 않을까 싶었다. 3년도 아니고 1년 정도야 버틸 준비가 되어있었는데 운 좋게도 이 목표는 벌써 달성되었다. 얼마 전에 쓴 두 편의 글이 도합 조회수 일만을 달성해 주고 차례로 글 랭킹도 바꿔 주었다. 상당히 고무적인 결과였다. 인정욕구가 강한 나로선 매슬로의 욕구단계 4계단을 한꺼번에 껑충 뛰어넘으며 마지막 자아실현의 단계에 훌쩍 다가서게 했다. 특별히 실현할 자아는 없지만 혹시 누가 굳이 상이라도 던져주겠다면 마다할 이유도 없겠지. 정신승리는 가끔 지겹다. 눈에 보이는 결과로 내 창조성, 독립성, 자기계발, 정신적 성장을 증명해야 한다면 수상보다 적절한 것도 없을 듯하다. 그래야 나도 나를 설득할 수 있을 것 같다. 올해는 직장 내 글쓰기 대회에서라도 입상을 한번 해봐야겠다.
얼마 전엔 다나카와 사진을 찍었다. 지명받지 못하는 호스트 컨셉을, 그의 말대로 하면 '그 짓거리를 4년 동안했다'는데 꺽이지 않는 마음이란 거기서 나왔나 보다. 신주쿠 가부초키에서 지명 한번 받지 못했단 그는 언젠간 올 반응을 기다리며 설거지나 세차로 연명했다고 한다. 빨래장갑을 낀 이 불쌍한 컨셉도 나름 세계관이란 게 있어서 어느 순간 사람들이 동화되고 좋아하기 시작하더니 아주 유명해졌다. 특별히 팬은 아니지만 나는 그 세계관보다 4년이란 존버의 시간이 오히려 인기의 기폭제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불확실한 미래의 두려움 속에서도 어쩔 수 없이 현실을 버티고 섰는 수많은 다나카들이 있으니까. 그들을 대리하는 표상으로 대중이 이 캐릭터를 키워나가고 있는 게 아닌가. 다니카는 아주 겸손한 자세로 아리가또 고자이마스 라고 답했다.
시간을 떠올린다는 건 어쩐지 시선을 멀리 둬야 하는 일인 것 같지만 실상은 가까운 것들의 반복과 반복과 반복들인지 모른다. 그 무한의 굴레를 잘 버티고 나와도 또 역시 굴레의 통돌이 안이겠지만 탈탈 털고 바닥까지 가라앉았다 올라오면 기분이나마 전환된다. 이것도 힘이라면 힘이고 가라앉는 과정에서 오는 자기혐오와 비통을 감내해 낼 수 있다면 거기 자주 빠졌다 나오는 것도 괜찮다. 그것도 재능이라면 재능이겠지. 그게 뭐가 됐든 무언가를 버텨낸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니까. 헬스에서 고중량 훈련을 하는 것은 역치값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함이다. 마찬가지로 4년을, 10년을 버텨낸 사람에겐 그 아래의 3년이나 9년쯤은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결국 역치 아래의 시간들을 더 잘 다루게 되고 초조함도 초월하게 된다. 그렇다면 멋진 일 아닌가. 퇴사나 이혼도 멋진 선택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버티고 견디는 나의 하루도 멋진 것이다. 그렇다면 나도 이런 멋진 글로 조회수에 한번 도전해 봐야지. 그렇지 않은가. 다니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