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만 흥분해도 과도하게 격정적인 스타일이 된다. 제스처보다는 목소리가 격정적으로 변하는데 최근에는 말하는 도중 일정 RPM이 넘어가는 걸 스스로깨닫기도 한다. 아차 싶기도 하지만 이내 될 대로 돼라 내버려 두는 편이다. 한 번 터지지 않고서는 곪은 나를 치유할 수 없다. 언제부턴가 화내고 싶을 땐 화내고 지적하고 싶을 땐 지적하는 게 정신건강에 이롭단 확신이 들게 됐다. 당장은 욱 해 보이더라도 쌓인 울컥을 토해내야 장기적 컨디션 조절이 가능해진다. 몇 개월 잠시 손발 맞추는 TF가 아닌 이상 직원들에게도 이것이 더 이로울 것이다. 속으로 꿍해놓으면 점점 더 사소한, 지엽적인 마이크로 같은 지적들이 늘어갈 것이다. 차라리 하고 싶은 말, 못마땅한 점을 그때그때 표현하는 것이 상호 간에 유익할 수 있다. MZMZ 하지만 밑도 끝도 없이 눈치 보고 참고 삭이라면 위로도 아래로도 무가치한 존재가 된다. 그것은 견딜 수 없다. 하고 싶은 바, 말하고 싶은 바에 당당하지 못한브레이크가 걸린다는 것은 자기 확신 내지는 프로페셔널이 없다는 말과 상통한다. 합리화라 해도 어쩔 수 없다. 이 나이, 이 직급까지 자기 스타일을 이룩하지 못하고서야 어찌 진짜 월급쟁이라고 할 수 있나. 이것은 회사에 대한 충성, 의리 따위의 속물적 본성에 대한 얘기가 아니라 자기 업(業)을 대하는 기본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 먹고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우리의 업장은 진지하고, 투쟁적이며, 매몰찬 곳인데 누구에게 밉보이거나 미안하다고 할 말을 회피하는 것은 짜증 난다. 책대로 정말 미움받을 용기가 필요한 세상이다.
물론 이 격정적에 대한 고민이 잦아진 것도 사실이다.
잠깐만시뮬레이션해 봐도 이 격정에 대한 피드백이 얼마나 위태로울지 짐작할 수 있다. 종종 싸움이 난다. 얼마 전에는 이유 없이 내가 괜히 '쌈닭이 되었나'란 자책을 하기도 했다. 격정적 톤은 인기가 없다. 데시벨 자체도 불콰하다. 말과 말이 꼬리를 물다 보면 본질은 달나라로 가고 태도만이 남는다. '근데 너 말투가 왜 그래 듣다 보니 짜증 나네' 식이다. 격정은 꼬투리 잡히기 십상이고, 정신 차리고 보면 어느새 전세 역전인 경우가 태반이다. 그래서 요즘 외롭고 고독한가. 몰아친 파고에 퍼거슨(맨유 감독)처럼 나는 아직도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데 이내 사람들은 점심 먹으러 일어서고, 주식 얘기나 하고, 담배나 피우러 나간다. 세상전체가눈치고 코치고 다밥 말아 처먹었나 싶을 정도다. 격정은 이런 낭패와모멸감들을 견디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나도진지그만 빨고하하와호호를 만나고픈 마음이 굴뚝같다. 다만그게 잘 안될 뿐이다. 잔잔한 여운으로 나를 열받게 하는 무언가가 아직 남아있는데무 자르듯 감정을 지우고 입고리를 올리는 너희들은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 것이냐. 내가 비정상이라도 그것은 내 스타일이 아니다.
<퍼거슨의 부들부들>
오랫동안 나도 이 진지에 대해 고찰해 본 적이 있다. 나한텐 이렇게 중요한 것이 왜 너에겐 아무것도 아닌 것인지. 이쪽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어젯밤에도 나는 이 문제를 뜯고 씹고 쫄이고 늘이느라 뜬눈으로 밤잠을 설쳤다. 아침 밥상머리에서도 핀잔을 들었을 것이다. 밥이나 먹으라고. 대부분은 그러거나 말거나나, 막상 출근해 보면 다들 유야무야 지나갈 거라고. 왜 쓸데없이 일어나지도 않은 걱정을 사서 하냐고. 대단하다. 사실 나도 안다. 경험컨데 아내 말이 맞을 것이다. 대부분 유야무야 지나간다. 그러면 지난밤과 밝아오는 아침과 피로한 머릿속은 무보수 초과근무가 된다. 남들 다 자는 곤한 밤에 혼자 똥볼 차느라고 쓸데없는 에너지를 낭비했다니 억울하기 그지없다. 이 무보수 초과근무가 10년을 넘어 20년 가까이 쌓이다 보니 내 울화와 한탄은 바로 여기서 시작했나 보다. 요즘 그걸 느끼고 있다. 나의 격정도 거기서 기인했을 것이다. 더구나 유야무야는커녕 해결 근처도 가지 못한 상태에서 관계상, 예의상 종결처리한 것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밑도 안 닦고 팬티올리고 사는 세상이라면 내 코만 예민하다고 자책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벚꽃이 핀다. 기상관측 이래 저 아래동네는 102년 만에 가장 일찍 개화한다는데 내게도 봄꽃이 처방약이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