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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긴오이 Aug 12. 2024

독립유공자 유족 안하겠다고 한 썰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독립유공자 포상신청을 했다가 결국 퇴짜 맞았다. 23년 11월에 접수시켰으니, 장장 9개월을 노심초사했다. 국가에선 보통 3.1절과 8.15 광복기념 2번의 포상 심사를 가지는데 3월 포상은 시기적으로 늦었다며 8월 심사대상으로 분류되었단 소리는 들었었다. 그래서 7월 중순쯤이면 결과가 나오겠거니 했는데 8월 9일이 다되록 연락이 없어 전화를 걸었더니 우편발송을 받아보고 문의하란다. 무슨 8.15가 당장 코앞인데 아직도 결과가 안나왔냐 했더니 그제야 검색해보고 보류로 분류되었다고 한다. '되면 되고, 안되면 안된거지 보류는 또 무슨 소리야' 하고 속이 끓어올랐으나 참고 이유를 물었더니 할아버지는 1945년 이전 기록에 행적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이게 무슨 소리야' 싶었다. 그런 건 신청서 작성 당시에도 아무런 안내가 없었는데... 물론 신청 서식 어디에도 그런 내용들은 없었다. 결과적으로 국가보훈부의 포상심사 기준은 1945년 이전 기록물에 의해서 활동내역이 증명된 경우에 대해서만 유효하단 안내를 받았다. '이런 ㄴ미' 속으로 욕이 나왔다. 사실 이런 심사에서 가장 중요한게 '증명'이다. 할아버지가 만세를 부르다 총탄에 맞으셨다는 건 내가 대학생이 다 돼서 들은 일종의 가문의 전승 구전 신화일 뿐이었다. 그걸 증명할 방법이 없으니 그간 그러려니 했던거지. 그런데 이전 글에서 밝혔다시피 그 만세고개에 유적비가 세워지고, 거기에 할아버지 성함이 발견되고, 그래서 문화원 등의 서적을 찾아보니 할아버지의 인물편이 찾아졌고, 그래서 그 책을 바탕으로 문서를 추적해보니 우리나라 독립운동사 편찬위원회에서 발간한 '독립운동사 제2권 제3절 양양군편'에 할아버지 성함이 계셨던 것이다. 특히 이 과정에서 조금 더 흥분하였던 것은 이 문건이 다른 어느 곳도 아닌 국가보훈부 홈페이지내 '공훈전자사료관'에서 검색되었기에 그 진위에 대해서는 이보다 더 확실할 수는 없다고 아버지와 난 기뻐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것은 민간에서 발행한 1971년 상의 단순 기록물에 불과할  뿐, 심사를 뒷받침할 객관적인 증빙 자료는 못된다는 담당자의 답변을 들었다. 그것도 장장 9개월만에. 나는 잠시 어질해졌다. 아니 그럼 애초에 객관적이지도 않은 자료를 왜 홈페이지에 걸어놨냐고 물었더니 그냥 서비스 차원일 뿐이란다. '와! 뭐 이런~' 괜히 바보된 느낌이 들었다. 가문의 사직을 바로 세우는 일이라고 괜히 흥분했던 아버지와 내가 무안해졌다. 아니 1945년이란 그런 심플한 심사기준이 있었으면 미리 안내나 고지를 했어야지, 그 고생을 시켜놓고.... 그리고 이 새끼들은 국가기관 홈페이지에 게시되어 있으면 그게 일반 국민들의 시각에서는 당연히 고시나 공표에 준하는 객관성과 신뢰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모르나. 아니 그럼 왜 제목은 저따구로 사료관이니 원문사료실이니 하고 적어놓은 거야.


국가보훈부 홈페이지 내 공훈전자사료관 원문사료실


배신감이 밀려왔다. 처음에는 탈락에 대한 미련때문인가 했다. 물론 그게 제일 중요했겠지. 하지만 사람 헷갈리게 만든 것도 화가 나고, 아쉬운 사람이 결국 기다리다 못해 제 손으로 연락해서 받아든 결과가 결국 이것이었나' 하는 현실도 참담했다. 뭔가 전혀 배려받지 못했다는 모멸감이 밀려왔다. 그래도 독립유공자에 대한 포상 심의지 않나.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우리나라 5천년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의 독립운동사요, 그 중에서도 가장 으뜸으로 치는 3.1 운동사 아닌가. 그 대상을 심사하면서 우편물 받아보고 얘기하라거나, 1945년 아니면 안된다는 단순 심플한 잣대를 갖다 댄다는 것이 허망했다. 담당자는 그 기록물을 읽어보지도 않았나. 일제측 기록에는 6백명이라고 하나 증언자들의 말로는 1천명이 넘었다 하며, 군중을 향해 무차별로 이루어진 사격이었다. 양양군 관내에서 가장 많은 사상자(사망자9명, 부상자 20명)를 낸 운동이며, 할아버지는 그 만세운동의 부상자였다. 1천여명이 다 유공자들이지만 그나마 기록으로 확인된, 그러니까 성명이 밝혀진 사망자와 부상자 중, 이제야 그 한 명이 심사를 신청한 것이다. 사료에서 보듯 부상자들은 일제의 수색을 염려해 치료도 몰래 숨어서 진행해야만 했다. 그러니 기록에 남을 수 없지. 기록에 없다고 없는 사실이 되냐. 보통 과거사는 그 이후에 진실을 바로 잡는데 왜 1945년 이라는 년도에 포인트를 맞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사망자들은 다 유공자가 됐다. 사망신고가 있었을 테니. 하지만 무차별 사격인데 사망자만 있고 부상자는 없을 리 없다. 뻔한 이야기인데 그냥 앵무새처럼 1945년만 얘기하는 담당자 때문에 미치는 줄 알았다. 3.1 운동을 폄하하기 위해 일제는 그 수치들을 축소 보고했다. 이 과정에 빠진 사람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그런 걸 바로 잡자고 책임있는 위원회에서 사학 전공의 집필자들이 그 오랜 시일을 소비해가며 각 지방을 현지답사하고 일제의 재판기록을 일일이 복사 비치해 대조한 끝에 작성했다는 것이 '독립운동사'이다. 정작 우리가 작성한 기록은 참고자료가 되고, 일제가 작성한 문서가 유공자를 선정한다니. 그걸 몰랐네.


전화로 갑론을박할 땐 울화가 치밀더니 막상 전화를 끊고나선 차분해졌다. '그까짓 거 됐다 그래' 싶었다. 따지고 보니 지금껏 그런 거 인정해주지 않아도 잘 먹고 잘 살아왔다. 다만 아버지 연세가 이미 여든 중반이시고, 이제 살날도 얼마 남지 않으셨는데 내심 그런 아버지께 훗날 조상뵐 낯이나 만들어 주고 싶었나 보다. 최소한 못나서, 못배워서 그런 신청 엄두도 못내본 아버지께 한은 남기지 않았다. 대신 아버지는 물론이고, 그 삼대에 해당하는 내가 이미 오십을 바라보는데 무슨 유공자 혜택나 바라고 구걸한 것 같은 이 더러운 기분은 청산해야겠다. 그 허울뿐인 공훈 전자사료관에서 할아버지 성함과 활동은 삭제하여 줄 것을 요청하기로 했다. 필요하다면 그런 활동도 없었으니 그냥 빼달라고도 할 것이다. 국가와 국민이 동등하고, 그 입장에선 서로 기브앤 테이크(give&take)다. 그까짓 포상이 뭐가 대수라고 삼천만이 외쳤다는 만세운동 뒤에 겨우 1만 8천여명의 독립유공자 명단이 말이 되나. 정작 침략자인 일본은 260만이 넘는 유공명단을 보유하고 있다는데. 이제 당사자들은 다 돌아가시고, 그 후손들마저 돌아가시는 판국에 그깟 표창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저렇에 인색한지 모르겠다. 날이면 날마다 태극기 걸라고 소리 높여 외칠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 각 가정에 한분쯤을 다 가지고 계실 그 유공자들을 아낌없이 대우해주면 애국심도 저절로 불탈 것이다. 이제 유공자 3대가 오십을 다 바라보는 마당에 그 뒷 후손들이 독립유공이 뭔지 알게 뭐냐. 지금의 3대들이 그나마 독립유공의 역사를 긍지로 받아들일 마지막 세대들이다. 만약 이번 삭제요청이 받아들여지면 당시 기사문 운동의 공식적인 부상자는 20명에서 19명이 된다. 국가가 스스로 역사를 지워나가는 꼴이 된다. 그런 걸 알려나 모르겠지만 인정 안해준다는데야 나도 독립유공자 후손 안할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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