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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긴오이 Jun 25. 2023

아내 대신 베개를 안고 잡니다

우리 집에선 내가 제일 일찍 잠자리에 든다.

일찍이라고 해서 밤 10시나 11시쯤은 아니고 12시쯤이다. 어찌 보면 일찍이라 하기에도 뭣한 시간이다. 하지만 딸애와 아내의 취침시간과 비교하면 일찍이란 표현에 무리가 없다. 취침시간의 마지노선을 정해놓은 사람은 나 하나뿐이다. 딸애나 아내, 두 사람은 12시 너머까지 무언가를 한다. 루틴보다는 그때그때의 재미나 과업이 더 중요한 듯하다. 난 웨이트 훈련을 일상에 녹여내고자 하는 사람이므로 컨디션 조절을 무엇보다 중요시한다. 경험컨대 신체리듬을 망가트리는 일등공신은 수면부족이다. 적당한 수면시간을 확보하지 못하면 그 여파는 다음 날의 초침, 분침, 시침 3형제를 모두 꾸벅이게 만든다. 당연히 스케줄과 업무, 식단 등이 엉키며 고유의 리듬도 파괴된다. 이러한 부작용의 장기적인 축적은 개인의 도전이나 창의, 영감 같은 영적인 요소들까지 좀먹어 들어간다. 나는 이러한 것들을 치환한 경제적 손실값을 두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지만 그럴 능력이 없어 늘 안타깝다. 아마 성공적으로 수치를 작성한다 해도 둘은 별 관심이 없을 것이다.


혼자 침구를 정리하고 자리에 누우면 제일 먼저 커다란 베개를 끌어안는다. 내 침대엔 총 4개의 베개가 있는데 원래 침구를 살 때부터 구성되어 있었던 오리지널 베개와 경추 건강에 맞춘 맞춤형 베개 둘이 따로 있다. 오리지널 베개는 크기 면에서 끌어안는 맛이 있다. 마치 커다란 개 한 마리를 끌어안은 느낌이다. 우리 집은 '방문을 닫지 않는다'는 나름의 가풍이 있어 보통 침실엔 거실의 빛이 들어오게 되는데 커다란 베개를 얼굴까지 끌어안으면 암막 효과까지 있어 안성맞춤이다. 내게 있어 베개의 기능성은 보통 여기까지였다. 좌나 우, 그러니까 모로 누워 자야만 편안함을 느끼는 내게 기능적으로 매우 탁월한 베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 어느 날은 베개를 끌어안는데 평소보다 특별함더 크게 느껴졌다. 뭐랄까 좀 더 높은 차원의 안정감이랄까? 그간 베개란 존재를 의식해 본 적이 없는데 나는 갑자기 어리둥절해졌다. 이 한아름만 한 정서적 부피의 안정감이 무엇인지, 왜 갑자기 나타났는지. 도대체 어디서 온 건지 따위에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아직 잠나비가 날아들기 전이므로 나는 잠깐 망상의 시간을 허락했다. 혹시 사물에 집착하면 어느 순간 그 대상이 생명처럼 느껴진다는데 바로 지금 그걸 느끼고 있는 걸까? 그렇다고 사십이 다 넘은 나이에 고작 베개 따위에 집착한다니 그건 너무 우스운 일 아닌가? 나는 갑자기 펼쳐진 베개의 새로운 인식에 탐구의 촉을 세울지 말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의도하지도 않았는데 어쩌다 강제로 해외진출하게 되었다는 싸이처럼 나도 베개에 대해 뭔가를 골똘히 사유해야만 하는 일종의 의무감에 휩싸였다. 그리고 그 밤, 나는 베개를 파고들다 당연하게도 우리의 부부관계에 대해까지 물음의 꼬리를 늘이게 되었다.


이슬아 작가는 자기 수필집에서 이런 말을 썼다.


부부는 다른 이와 사랑에 빠질 가능성을 모색하기를 어느 순간 멈추고 서로를 확정한 이들이라고....



참 대찬 정의가 아닐 수 없다. 결혼도 안 한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명쾌할까. 나는 처음엔 고개를 끄덕끄덕 흔들다가 무릎을 '탁' 하고 쳤다. 한 타임 늦은 깨달음이었달까. 그리곤 요즘 내가 왜 자꾸 과거로 걸어 들어가고 있는지, 그리고 거기서 왜 옛사랑에 대한 글까지 끄적대고 있는지에 대한 작은 의문을 풀었. 저 명쾌한 정의에 기대 보자면 그건 내가 결혼이란 의식을 통해서 미래에 대한 사랑을 아예 거세시켰으므로 이제는 오직 과거를 향해서만 난 자유롭고 결백(innocence)할 수 있는 존재였다. 그러니까 베개는 그 순결의 세계로 문을 여는 일종의 '이상한 나라의 폴'의 팟쿤(삐삐)같은 매개체였다. 주위에 친구가 없고 원래 혼자 있길 좋아하는 나로서는 나름의 일탈 장소를 공간이 아닌 시간의 차원으로 선택하고 있었던 셈이다. 어찌 보면 불쌍하기도 하고 또 대단히 은밀하다 할 수도 있다. 절대 들키지 않을 일탈이자 외도이기도 하니까. 가볍게 접근한다면 베개는 유아틱한 욕구나 에로틱한 욕망, 혹은 외로움의 정서 등으로 설명될 수도 다. 그건 뻔한 스토리다. 하지만 내가 진짜 출발시키고 싶은 이야기따로 있다. 그것은 내가 점점 더 아내의 손길을 덜 타는 사람으로 변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아내는 그걸 알고 있을까. 갑자기 모든 것이 선명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닌 게 아니라 나는 요즘 부시크래프트나 차박, 농막 같은 홀로 독립이나 생존성 짙은 냄새를 풍기는 유튜브 채널에 푹 빠져있다. 언제부턴가 '나는 자연인이다' 가 나오면 채널을 고정하기 일쑤고, 김태리 주연의 '리틀포레스트'는 아마 여덟 번 이상은 본 것 같다. 딸애는 어쩌다 OCN 같은 영화채널에 리틀포레스트가 나오면 '아빠 최애 영화네. 또 보는 거야' 하고 묻곤  앞을 지나간다. 한 번은 아내에게 나중에 나중에 노년이 되면 아버지댁을 리모델링해 전원생활을 해보지 않겠냐고 넌지시 물어본 적이 있다. 단칼에 거절당했다. 나는 그 답이 떨어지는 순간 희미하게 '이승윤이 나를 찾아오면 어떤 음식을 대접해야 하나'  하고 잠깐 머리를 굴렸더랬다.


이슬아 작가만큼은 아니어도 나도 이참에 부부관계를 '트램펄린 위를 같이 뛰는 사람' 이라 정의해 봤다. 취향이나 기치관 면에서 각자의 영역을 놀고 있다 하더라도 어느 순간에는 함께 발을 굴러 점핑해야 하는 순간이 있다. 그런 삶의 리듬이 있다고 믿는다. 엇박이나 교차는 있을지언정 그런 것들 터치없이 엉키면 삶은 좀처럼 튀어 오르지 않을 것이다. 부부로 사는 것도 냉정히 보면  둘이 힘을 합쳐 좀 더 나은 미래를 그려보자는 파이팅이 담겨있다. 설명하긴 힘들지만 서로가 아닌 베개를 가까이 끌어안는 것은 별로 좋은 징조는 아닌 것 같다. 그렇다고 이 글이 행여  늬들은 하지 마! 같은 이상한 결론에 도달하는 것은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다. 그냥 그렇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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