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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연 Sep 23. 2017

밤이 깊은 밤

주변이 고요해서 소리가 잘 들리는 밤

 그녀는 마음이 단단한 사람이었다 힘들었던 경험을 얘기할 때도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한결같은 어조로 담담하게 말했다. 애쓴다기 보다는 원체 마음이 고견한 사람인 듯했다. 그런데 분명 그녀는 담담하게 자기 이야기를 할 뿐이었지만 오히려 슬퍼진 것은 나였다. 많이 힘들었을 일을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서러워졌다. 그간 얼마나 힘들었을지, 얼마나 오랜 시간 아파하며 단단해진건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녀의 말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떤 코멘트가 그녀를 위로할 수 있을까. 차라리 침묵하는 편이 더 낫겠단 생각이었다. 많이 힘드셨죠? 라거나 당신의 삶을 응원한다는, 앞으론 정말 좋은 일만 가득할 거라는 말들조차 의미 없게 느껴졌다. 지금은 전적으로 대화의 주체를 그녀에게 넘겨줘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젓가락 소리도 최소한으로 줄여가면서 그녀의 말을 들었다.
 그녀의 목소리와 표정, 그리고 보이지 않는 감정에 집중하며 음식물을 천천히 넘겼다. 그런데 그 순간 알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담담하게 이야기를 이어오던 그녀의 표정이 갑자기 일그러지더니 이내 울음을 터뜨렸다. 그 울음은 전혀 예측할 수 없었기에 나는 조금 난감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표정하나 변하지 않은 채로 담담하게 이야기하고 있었으니까. 그녀의 벌개진 눈을 보면서도 머릿 속이 복잡해졌다. 어떤 위로도 쉽게 할 수 없었다. 진중한 그녀의 감정이 자칫 가볍게 변해버릴까봐 조심스러웠다.
 우선 그녀의 곁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천천히 생각해보기로 했다. 조심스럽게, 천천히 내 손을 그녀의 등에 갖다댔다. 그리고 최대한 같은 박자로 등을 토닥였다. 내 딴에는 따뜻하고 옅은 신호를 줌으로써 그녀를 조금이나마 편한 상태로 만들고 싶었다. 자신이 울 때 누군가 곁에 있다는 사실은 정말 큰 위로가 된다. 서글프고 외롭다 느낄 때 누군가 자신의 서글픔을 바라봐준다면 그 서글픈 감정들이 조금은 말랑해지는 것이다. 내 반응에 오히려 음식물이 얹힌 듯  놀라지 않도록 나는 아까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담담하게 그녀를 다독였다. 멈추지도, 속도를 늦추지도 재촉이지도 않았다.
나는 속으로 괜찮다고, 다 쏟아내도 된다고 그녀의 울음을 응원했다. 더 이상 나오지 않을 때까지 눈물을 쏟아내고 나면, 마음이 조금은 홀가분해지니까. 그래서 일부러 괜찮아, 잘 될 거야 따위의 말은 하지 않았다. 그만 울어도 된다는 신호로 비춰질 수도 있어서였다. 한참을 서럽게 울던 그녀가 천천히 울음을 멈췄다. 점점 울음이 옅어지더니 입술을 떨었다. 그러더니 나에게 고맙다고 했다.
는 그저 그녀의 등을 두드려줬을 뿐이었다. 그래서 고맙다는 말을 들을 자격이 없는 것 같아 부끄러웠다. 자기 울음을 끝까지 들어준 것은 내가 유일하다고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울 때 괜찮다고 하며 휴지를 건넸다고 했다. 그때마다 그녀는 아직 터뜨리지 못한 슬픔이 많음에도 찝찝한 채로 눈물을 멈춰야했다고. 아픈데, 서러운데 대체 뭐가 괜찮다는 건지. 펑펑 울고 싶은데 왜 자꾸 눈물을 닦으라는 건지. 평생을 살면서 남 앞에선 시원하게 울어본 적이 없다고, 오히려 찝찝함만 남아있었다고. 나는 그제야 힘들었던 얘기를 하면서도 담담했던 그녀의 표정이 이해가 되었다.
 힘들게 했던 상황보다 눈물을 멈추는 게 더 서러웠던 것이다. 감정이 찝찝해지는 것이 더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이야기 뿐 아니라 눈물까지 잘 들어주는 사람은 없었다고, 고맙다고 했다. 지금은 좀 후련해졌는지 그녀에게 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나를 보며 웃었다. 나는 고맙다는 말로 그녀의 표정을 대변했다. 나야말로 고마웠다. 나를 믿고 감정을 맡겨줬음에, 자신의 감정을 속이지 않았음에 감사했다. 전보다 더 후련해졌다하니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무슨 일이었냐고 묻지 않았다. 가뜩이나 아픈 일을 다시 상기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이제 그녀의 마음을 쉬게 해주고 싶었다.
상황에 대한 사실 확인보다 중요한 것은 상대와의 감정이 교류되는 일이다. 사람들은 가끔, 누군가를 위로한답시고 그 상황에 대해 캐묻곤 한다. 왜? 무슨 일인데? 다 이야기해봐. 들어줄게. 이렇게 말하다가 상대가 말을 하지 않으면 서운해한다. 하지만 때론 말하고 싶지 않은 것도 있는 법이다. 말이 없는 고요한 공간에서 그저 펑펑 울고 싶을 때가 있는 법이다. 울고 있는 누군가의 어깨를 잡으며 무슨 일이냐고 묻는 건 위로가 아니다. 그 사람이 다 울때까지, 감정을 비워낼 때까지 인내하고 기다릴 수 있는 자세가 위로이고, 진심이다. 단순히 자신의 호기심충족에 상대의 마음을 이용하지 말아야 한다.


그녀는 그 이후로 종종 내게 편지를 썼다. 주기는 정하지 않았지만 내가 답장을 미처 보내지 못했을 때도 우편함에 그녀의 편지가 있을때가 더러 있었다. 그 내용은 자신의 얘기가 아닌 주로 나를 응원하는 것이었다. 늘 나에게 고마움이 있다고, 나의 삶을 응원한다고, 언제든 힘이 들 때면 자기를 부르라고 자기도 내게 힘이 되고 싶다고. 그리고 예쁜 엽서며 예쁜 글귀를 적은 것을 같이 봉해서 보내주곤 했다. 나는 그녀의 마음이 너무 따뜻해서 편지로 주고 받는 일상이 매일 얼굴을 마주보며 밥을 먹는 관계보다 더 애틋하고 소중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나 역시 그녀에게 보내는 편지 가장 아랫 단엔 늘 고맙다는 말로 마무리했다. 정말 고마웠다. 꾹꾹 눌러쓴 글씨며, 예쁜 사진이 담긴 엽서며, 아름다운 글귀며 당장 취기가 도는 것 같았다. 예쁜 마음을 차곡차곡 접어 보내줬음에 그녀와의 관계가, 또 내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가 동시에 예쁘게 피어났다.


누군가의 울음을 멈추는 것은 그 사람의 입을 막는 일과 다름 없다고 생각해왔다. 아이가 울면 어른들은 줄곧 울지마, 뚝! 우는 아이는 산타할아버지가 선물을 주지 않는데 라는 말로 아이의 눈물을 그치려 한다. 하지만 아이들은 단순히 떼를 쓰는 게 아니라 감정을 표출하는 것이다. 이 물건 사달라고 저 물건 갖고싶다고 떼를 쓰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나 외로워요, 내 마음 좀 들어주세요. 하고 서럽고 속상한 감정을 눈물로 풀어내는 것 뿐이다. 이제 하나 남은 마지막 방법에 대해 부모들은 그것마저 끊어내려 하지만 우는 것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님을 세상 모든 부모들이 알았으면 한다. 그럴 땐 아이의 말을 차분히 들어보라고, 강압적으로 아이를 다루지 말고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왜 속상해하는지를 조곤조곤 마음에 경청해보라고.
조용한 곳으로 가서 눈을 마주치며 기다려주라고. 그럼 어느새 아이는 울음을 그치고 엄마를 보고 있을 것이다. 대화가 부족했던 것이다, 진심이 부족했던 것이다. 바라보면, 믿으면 분명 보였을 일이다. 아이는 단순히 물건에 떼를 쓴 게 아니라는 것을, 내 마음을 알아달라는 신호였음을.


나는 그래서 학창시절, 친구가 울때 대부분 아이들은 휴지를 갖다주거나 괜찮다고 울지말라고 다독이는 반면 나는 울어도 된다고 했다. 괜찮으니까 펑펑 울라고 그럼 조금 나아질 거라고, 지금 필요한 건 상황에 대한 설명도 억지로 감정을 없애는 것도 아닌 있는 있는 그래도 표출하는 일이라고. 우는 것은 전혀 부끄러운 게 아니라고. 난 오히려 솔직한 네가 자랑스럽다고. 위로의 방법이 달랐다. 울어도 된다는 말은 어떻게 보면 위로가 아닌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지금 우는 사람에게 더 울어도 된다니, 모순 아닌가? 하지만 상황이 힘든 것이 변하지 않는다면 그나마 감정이라도 터뜨려야 마음이 조금은 후련해지는 법이었다.
나는 힘든 일이 있는 사람들에게 더 울어도 된다고 말할 수 있는 어른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이의 눈물에 혹은 누군가의 눈물에 피하거나 타박하지 않는 어른.
 언젠가 초등학교의 운동장에서 넘어진 아이가 서럽게 울자 그 아이의 어머니는 아이를 타박하며, 남자애가 쪽팔리게 넘어졌다고 울어? 뚝 그쳐! 했던 것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나도 그때 초등학생이었지만 나는 유난히 사람들의 표정에 관심이 많았다. 그 아이는 온갖 서러운 감정을 목으로 꾸역꾸역 넘기고 있었다. 마치 먹기 싫은 음식을 몸에 좋다는 이유로 억지로 먹는 것처럼 힘겨워보였다. 아이는 넘어져서 아팠고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단지 '쪽팔림'에 국한 되었음에 더욱 서러웠을 것이다. 그 많은 감정을 억지로 꾸역꾸역 삼키던 아이의 눈빛, 표정이 아직도 생생하다. 내가 어른이 되면, 혹여나 누군가 내 앞에서 울음을 터뜨리면 나는 더 울어도 된다고, 너의 감정은 무엇이든 소중하다고 말해줄 수 있어야지. 속상하고 슬프고 누군가를 미워하는 감정까지도 무엇하나 하찮은 것은 없다고.
 네가 소중한 사람이기 때문에 너로부터 생겨나는 감정 또한 하나하나 모두 소중하다고. 그 무엇도 너의 소중한 삶을 막을 순 없다고. 운다고 상황이 나아지진 않겠지만 그래도 울고나면 머리가 조금은 맑아져. 마음도 개운해지고, 그럼 그때 다시 생각해봐도 되는 거야. 같이 생각해줄게. 너의 마음을 기다려줄게.  
 
 그리고 나는 정말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어른이 되었다. 봇물 터지듯 터져나오는 감정을 묵묵히 들어줄 수 있는. 누군가의 고달픈 시간을 위로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침묵임을 알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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