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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연 Oct 11. 2017

근사한 한 마디

당신의 삶을 믿어요 


얼마 전 상담을 하는데 한 어머니께서 자기 아이는 게임만 한다고 하소연하셨다.

분명 중학생 때까지만 해도 공부를 열심히 해서 전교권에도 들었던 아이인데 고등학교에 올라가고 얼마 안 되서부터 학원도 안 다니겠다더니 시험기간에도 게임만 한다고.

화를 내고, 타일러도 봤지만 아이가 사춘기라 더 대드는 바람에 어찌할 방도를 모르겠다고 하셨다.

나는 처음엔 아이가 공부가 아닌 다른 것에 관심이 생겼거나 부모와의 의사소통 부재로 인한 소외를 반항을 통해 풀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래서 어머니와 대화가 끝난 뒤 아이와 대화를 했다. 


"요즘 힘든 것 없어요?"

"네."

"스트레스받는다거나 속상했던 일 혹시 있으면 편하게 얘기해도 돼요."

"그런 건 없는데 음.."

"그럼 다행이네요. 앞으로도 ㅇㅇ이는 잘 지낼 수 있어요. ㅇㅇ이는 무한한 잠재력이 있는 사람이에요. 지금은 잘 모르겠죠? 아직 성장하는 과정이라서 그래요. 분명 몇 년만 있으면 ㅇㅇ이는 누구보다 멋있고 훌륭하게 자랄 거예요. 믿어줄게요. ㅇㅇ이의 인생이 정말 행복할 거라고, 앞으로도 언제나 늘 빛나기를 진심으로 바라요."

내 말이 끝나자 아이는 아랫입술을 깨물더니 이내 울음을 터뜨렸다.

"제가 그렇게 될 수 있을까요?"

아이는 믿지 못하겠다는 눈치였다.

잔뜩 겁이 먹은 표정으로 몸을 떨었다. 


"당연하죠. ㅇㅇ이는 분명 ㅇㅇ이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어요. ㅇㅇ이의 인생은 그 무엇보다 소중해요."

나는 아이의 손을 잡으며 이야기했다. 

아이는 자기를 믿지 못하겠다고, 겁이 난다고 했다.

아이는 많이 불안해 보였다.

첫인상이 당당해 보였던 것과 달리 속이 여린 아이였다.

단지 잘 될 거라고, 가능성이 있다고 말해줬을 뿐인데도 아이는 펑펑 울어 눈이 부었다.

사실 고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자신이 정말 잘할 수 있을지 두려움이 컸다고 했다.

중학교에서는 나름 전교권에 들었지만 고등학교에서도 그 성적을 유지한다는 보장이 없어 매일 혼자 터널을 걷는 기분이 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아이가 학교를 마치고 집에 오니 아무도 없었다.

아이는 평소처럼 동영상 강의를 들으며 공부를 했다.

강의를 세 개 듣고 이제 책으로 복습을 하려고 컴퓨터를 껐다.

그 찰나에 어머니가 집에 오셨는데 어머니가 오시자마자 부리나케 컴퓨터를 끄는 아이의 모습에 오해를 하셨다고 한다.


"너 이제 내일모레면 고등학생이야. 입학도 얼마 안 남았어. 정신 차려."

그게 어머니의 첫마디였다.

아이는 공부를 하느라 어머니가 집에 들어오는 소리를 미처 듣지 못했다.

그래서 그게 아니라 강의를 듣고 이제 복습을 하려고 막 끈 거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어머니는 막무가내셨다.

요즘따라 활기도 없더니 공부하기 싫어서 그런 거 아니냐며.


아이는 어머니가 보는 시각대로 자란다.

부모가 딱 그만큼의 영양분, 그만큼의 생각과 행동을 주면 아이 역시 제한적 성장을 한다. 

부모와 자식 관계뿐만 아니라 모든 관계가 그렇다.

내가 믿고 바라보는 만큼 상대와의 관계가 성장한다.

그 사람은 또 그럴 거야, 그 사람은 결국 그렇게 하겠지.

편협된 사고는 편협된 관계를 낳는다.

사랑은 모래로 메주를 쑨다 해도 믿고 기다려주는 것이다.


적어도 부모가 아이를 믿고 잘해주면 아이가 미안해서라도 바른 행동만 하게 된다.

부모가 원하는 방향의 아이로 성장할 것이라 믿거나 지도하기보다는 그저 아이의 행복과 성장을 빌어주면 된다.

그럼 적어도 행복하고 바른 사람으로 성장할 것이다.

그러면 된 것 아닌가?

표면이 행복한 것보다 내면이 아름다운 것이 더 가치 있다.

아이에게 말해주자.

너는 네가 원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너는 그 누구보다 소중한 사람이라고. 엄마는 언제나 너를 믿는다고.


부모에게 신뢰를 받으며 자란 아이는 결코 엇나가는 행동을 할 수 없다.

혹여나 아이가 자신을 속였다 해도 아이에게 아이만의 이유가 있음을 헤아리고 한 발 물러서서 기다려주자.

설령 어머니가 오기 전까지 아이가 게임을 하다가 오기 직전 컴퓨터를 껐다고 한들 어떤가.

요즘 얼마나 힘들었으면 스트레스를 풀까.

스트레스는 잘 풀렸을까? 하는 걱정을 하는 게 맞는 거다.

아이를 정말 사랑한다면, 아이를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조종하려 하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아이가 행복한 마음을 갖고 살아갈 수 있을지를 더 중요하게 바라봐야 한다. 


따뜻한 시각으로 바라볼수록 아이는 따뜻한 마음을 품고 살지만

부모가 냉정한 시각으로 아이를 다그치면

아이는 불안을 가지며 살아가게 된다.

자신의 삶은 아무리 노력해도 결국 잘 안 될 거라는 편협된 시각을 그대로 듣고 배우는 것이다. 


나는 어머니에게 아이의 입장을 이야기해줬다.

그날에 관한 대화를 해보고 아이의 상처를 보듬고 싶었다. 

그러자 그녀는 자기 아이를 이해하려 했다고 했다.
아이의 성적이 떨어진 것도, 혹여나 그날 컴퓨터로 게임을 했다 해도 그럴 수도 있는 행동이라고 차츰 이해를 하려 했다고.  

하지만 이해는 온전히 그 사람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과정이다.

나의 입장에서 바라보며 '그 정도면 괜찮다.'라고 용인하는 것이 이해가 아니라 그 사람의 입장에서 그 사람의 마음과 행동에 온전히 공감하는 것이 이해이다.

나의 입장에서는 온전한 이해를 하기에 한계가 있다.

나는 그런 경험을 해보지 못했기에 잘 모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이의 성향에 맞게 그 아이라면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겠다는 태도로 생각을 바꿔보는 것이 '이해'이고, 받아들임이다. 

어머니께 아이를 믿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드렸다. 

아이에게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아이가 잘 일어서기 위해선 어머니의 '말'이 필요하다고.

또 어떨 때는 어머니가 보시고 느끼시는 것들이 진짜가 아닐 수도 있으니 그럴 땐 충분한 대화를 해서 합의점을 찾아야만 한다고 했다. 


믿는 만큼 성장하는 것이 사람 관계다.


세상이 다 무너진 것 같을 때 나를 믿어주는 사람이 한 명 있다는 사실에 다시 살아갈 힘을 얻기도 한다.

믿음의 힘은 위대하다.

어떤 관계에서든 '나는 너를 믿는다고, 네가 어떤 삶을 살든 언제나 응원한다.'는 말은 늘 힘이 된다.

그 말은 고마움이 되어 우리의 마음에 오래오래 남는다.


'고맙다', '믿는다'는 말은 쉽게 쉽게 쓸 수 있어야 한다.

망설이지 말고 소중한 사람들에게 고맙다, 믿는다는 말로 그들의 삶에 희망을 주며 살아야 한다.

혹시 아는가.

너무 힘들어 홀로 술 한 잔 하고 있을 당신의 소중한 사람이 

당신의 믿음에 힘을 얻어 다시 열심히 살아갈지.


그래, 나를 믿어주는 사람이 있는데 다시 한번 해보자.

나도 열심히 살 수 있어.


믿음이 주는 힘은 이토록 위대하다.

엇나가는 사람일수록, 힘들어하는 사람일수록

채찍질보다는 따스한 말이 더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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